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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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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의(崔允儀, 1102년 ~ 1162년 10월 8일(음력 8월 28일)[1])는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이며 처음 이름은 최천우(崔天祐)다. 최충의 현손이다.
생애
요약
관점
어려서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음서로 벼슬을 얻으면서 자연스레 스스로 태학을 나왔다.[2]
1128년(인종 6)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로 있을 때 문과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태학박사(太學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우정언(右正言)·지제고(知制誥)로 옮겼다.[2]
1133년(인종 11)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겼고[3], 1136년(인종 14)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전중감(殿中監) 윤언식(尹彥植)과 함께 금에 파견되어 태종(太宗)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지냈다.[4]
1148년(의종 2)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 등과 함께 내시(內侍) 김거공(金巨公)과 환자(宦者) 지숙(之淑) 등 7인을 논박하고 그들을 쫓아 낼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자, 3일 동안 대궐문 밖에 엎드려 극력히 간언하자 왕이 드디어 들어주었다.[5]
같은 해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며[6]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양충찬(梁忠贊)·박유시(朴有時) 등 91인을 선발했다.[7]
1151년(의종 5) 어사대부(御史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옮겼고,[8] 이듬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와 태자태부(太子太傅)가 차례로 더해졌다.[9]
1153년(의종 7)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에 책록되고,예부상서(禮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2]
이듬해 지공거(知貢擧)로서 문과를 주관해 황보탁(皇甫倬) 등을 급제시켰고[10], 같은 해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를 지냈다.[2]
1155년(의종 9)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를 겸했다가[11], 같은 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는 동시에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나갔는데[2], 한 달도 되지 않아 동북면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판중군병마사(判中軍兵馬事)로 옮겼다.[12]
이듬해 수태위(守太尉)·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가 더해졌다가, 1157년(의종 11)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했다.[2]
같은 해 왕이 금오위(金吾衛)의 제상리(堤上里)에 이궁(離宮)을 세우려고 했는데, 최윤의가 간절하게 간언하여 끝내 그만두었다.[13]
그러나 왕이 문하성(門下省)의 관리들에게 정함(鄭諴)의 고신(告身)에 서명할 것을 독촉했을 때는 좌승선(左承宣)·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이원응(李元膺), 우승선(右承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공승(李公升), 우간의대부(右諫大夫議) 최응청(崔應淸) 등과 함께 부득이하게 서명했다.[14]
1161년(의종 15)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를 추가로 겸했고,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더해졌으며.[2], 이듬해 다시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이계원(李繼元) 등 32인을 급제시켰다.[15]
같은 해 61세로 졸하자 왕이 수태사(守大師)·문하시중(門下侍中)·상주국(上柱國)·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를 추증했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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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의종[17]의 명으로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50권을 편찬했는데,[18] 고종(高宗) 때[19] 금속 활자로 인쇄되어, 오늘날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알려졌다.[20]
가족 관계
- 증조 - 최유선(崔惟善, ? ~ 1075년) : 수태사(守大師)·문하시중(門下侍中)·판이부사(判吏部事)·상주국(上柱國), 문화공(文和公), 문종(文宗)의 배향공신
※형제에 대해서는 아버지 최용 문서를 참조하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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