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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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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앵전(春鶯囀)은 1828년(순조 28년),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의 4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창작한 궁중무용(정재)이다.[1] '봄 꾀꼬리의 노래'라는 이름처럼, 화창한 봄날 버드나무 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모습을 섬세하고 우아한 독무(獨舞)로 형상화했다. 이 춤은 약 한 평 남짓한 화문석(花紋席) 위에서만 펼쳐지는 독무 형식이 특징이다.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절제된 움직임과 세밀한 표현이 강조된다.

명칭

춘앵전(春鶯囀)이 공식적인 명칭이며, ‘꾀꼬리가 지저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때로는 춘앵무(春鶯舞) 또는 춘앵전무(春鶯囀舞)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춤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이다.

역사와 발전

창작과 전승

춘앵전은 순조 28년 6월, 창덕궁 연경당에서 열린 연향에서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창작자인 효명세자는 춤의 형식뿐만 아니라 춤 중간에 부르는 노래인 창사(唱詞)까지 직접 지었다. 그 이름은 당나라 고종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악공에게 음악으로 만들게 했다는 고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지나, 춤의 형식과 내용은 효명세자가 완전히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최초의 공연 기록은 1828년의 연회를 상세히 기록한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에서 확인되며, 이후 헌종과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중요한 연회에서 꾸준히 공연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를 통해 명맥이 이어졌고, 해방 이후 김천흥(金千興) 등 당대 최고의 무용가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지역의 역사·예술적 가치를 인정하여 춘앵전을 종로구 향토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하기도 했다.[2]

사료 속의 춘앵전

조선 시대 의궤(儀軌)에는 춘앵전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진작의궤(進爵儀軌)』에는 춘앵전을 추는 무용수가 한 명임을 명시하여, 이 춤이 처음부터 독무(獨舞) 형식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3]

○春鶯囀呈才女伶舞一 彩雲
— 『진작의궤(進爵儀軌)』 권1, 奎14375, 114a면.

또한 헌종 대의 연향을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는 당시 무용수의 화려하고 상징적인 복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무용수는 꽃관(花冠)을 쓰고, 노란색 비단 홑옷(黃綃單衫)에 붉은 치마(紅綃裳)를 입었으며, 그 위에 초록빛 가폐(霞帔)를 둘렀다. 또한 금실로 수를 놓은 띠를 매고 오색 한삼(五色汗衫)을 착용했으며, 붉은 비단 토시와 진홍색 신발까지 갖추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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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구성

춤사위

춘앵전은 화문석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느리고 우아하게 펼쳐지며, 정재 가운데 가장 다채롭고 시적인 동작 용어를 가지고 있다.

  • 화전태(花前態): '꽃 앞의 자태'라는 뜻을 가진 동작이다. 무용수는 두 손을 모으고 꽃을 감상하는 듯한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감정 표현을 절제했던 궁중 정재의 일반적인 특징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 회란(廻鸞): 새가 날개를 펼치고 돌 듯 양팔을 벌리고 좌우로 한 번씩 도는 동작이다.
  • 낙화유수(落花流水):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한삼을 뿌리며 회전하는 동작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 탑탑고(塔塔高): '탑을 높이 쌓듯' 세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며 양팔을 점차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이다.
  • 과교선(過橋仙): '신선이 다리를 건너듯'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동작이다.
  • 연귀소(燕歸巢): '제비가 둥지로 돌아가듯' 춤을 추며 뒷걸음으로 물러나 마무리하는 동작을 의미한다.

음악과 창사

반주 음악으로는 느리고 서정적인 가락의 평조회상(平調會相), 즉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이 사용된다. 춤의 도입부에서 무용수가 부르는 창사는 효명세자의 자작으로, 다른 정재와 달리 왕의 덕을 찬미하기보다는 봄날의 서정을 묘사한다.[5]

娉婷月下步 (빙정월하보) / 고운 자태로 달빛 아래 거니니
羅紬舞風輕 (나주무풍경) / 비단 소매 바람에 가벼이 춤추네
最愛花前態 (최애화전태) /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꽃 앞의 자태이니
君王任多情 (군왕임다정) / 임금의 다정하심에 힘입었네

복식

복식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앵삼(鶯衫)을 기본으로 하며, 성별에 따라 구성이 다르다.

  • 여령(女伶): 사료에 기록된 바와 같이,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노란 앵삼에 붉은 치마(紅綃裳)를 입는다. 어깨에는 초록색 하피(霞帔)를 두르고 허리에는 붉은색 수대(繡帶)를 맨다. 손에는 오색 한삼(五色汗衫)을 낀다.
  • 무동(舞童): 머리에 복건(幅巾)이나 아견모(砑絹帽)를 쓰고 노란 앵삼을 입는다. 하의로는 옥색 치마 위에 녹색 쾌자(掛子)를 입고 검은 각대(角帶)를 두른다. 손에는 붉은 한삼(紅汗衫)을 착용한다.[6]

의의

춘앵전은 창작자인 효명세자의 개인적인 예술성이 반영된 작품으로 좁은 화문석 위에서 펼쳐지는 절제된 춤사위를 통해 자연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까지도 조선 궁중무용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춘앵전은 조선 궁중무용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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