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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코 (캘리포니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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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코(Calico)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군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유령 도시다. 1881년 은광에서 자원을 캐기 위해 몰려온 개척자들이 세워 많은 사람들이 몰렸으나, 1907년 붕사 채취가 끝난 후 완전히 버려진 지역이 됐다. 하지만 이후 군립공원으로 지정되고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현재는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역사
요약
관점
1881년에 네 명의 탐험가들이 그레이프바인 역(현재의 바스토)을 떠나 북동쪽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봉우리를 "캘리코색"이라고 묘사한 까닭에 이 봉우리가 속해 있던 산맥 뿐 아니라 거기에 세워진 마을도 모두 캘리코라고 불렸다. 이 네 명의 탐사자들은 이 산에서 은을 발견하고 188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 최대 은 생산지였던 실버 킹 광산을 열었다. 1882년 초에 우체국이 설립되었고 주간지인 캘리코 프린트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곧 호텔 3개, 잡화점 5개, 정육시장 1개, 술집, 사창가, 식당 3개, 하숙집 3개가 세워졌고, 카운티는 학군과 투표소를 설립했다. 이 마을에는 보안관 부보안관과 경관 2명, 변호사 2명, 치안판사 1명, 위원 5명, 의사 2명도 있었다. 웰스파고의 사무실과 전화 및 전신 서비스도 있었다. 1883년과 1885년 사이에 은 생산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캘리코는 500개 이상의 광산과 1,2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1][2] 지역 악당들이 부트 힐 묘지에 묻혔다.
마을이 세워진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캘리코산에서는 붕산염 광물인 콜레마나이트가 발견되고, 1890년에는인구가 3,500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인, 아일랜드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등의 해외 이주자들도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3] 그러나 같은 해에 은매상법이 제정되어 은값이 인하되었다. 1896년까지 은 가격은 트로이 온스 당 0.57 달러로 떨어졌고, 캘리코의 은광산은 더 이상 부를 창출해내지 못했다.[1] 우체국은 1898년에 중단되었고[4] 학교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2] 세기가 바뀔 무렵, 캘리코는 유령도시에 불과했고[3] 1907년 붕사 채굴이 끝나면서 완전히 버려진다. 많은 원래의 건물들은 바스토, 다게트, 예르모로 옮겨졌다.[3] 유령 도시가 된 캘리코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1915년경에 이루어졌는데, 그 때 가공되지 않은 은광산의 퇴적물로부터 은을 회수하기 위해 청화법을 사용하는 공장이 건설되었다. 너츠베리팜의 창립자인 월터 노트와 그의 아내인 코델리아가 이맘때 뉴베리 스프링스에 정착했고, 노트는 공장에 들어갈 삼나무 시안화 수조 제조를 지원했다.[3][5] 1951년, 캘리코는 이제 젠다 광산 회사에서 월터에게로 넘어갔다.[6]월터는 오래된 사진들을 참고하며 마을을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기 시작한다. 그는 프레디 "캘리코 프레드" 놀러라는 이름의 오랜 직원을 상주 관리인 겸 관리인으로 임명했다.[7] 1966년 월터는 마을을 샌 버나디노 카운티에 기부하기로 결정했고, 캘리코는 카운티 지역 공원이 되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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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캘리코는 이제 실버 러시 때의 번창했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일부 건물들은 관광객들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파사드를 가진 형태로 다시 세워졌다.[9]
사진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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