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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이그나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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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그나티우스 또는 이그나티오스(그리스어: Ιγνάτιος, 798년경 ― 877년 10월 23일)는 847년 7월 4일부터 858년 10월 23일까지, 그리고 867년 11월 23일부터 877년 10월 23일에 사망할 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다.[1]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10월 23일을 축일로 성인으로 공경한다.
전기
요약
관점

이그나티오스는 798년경에 니키타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와 프로코피아, 외할아버지는 니케포로스 1세였다. 어린 나이에 니키타스는 새로운 근위 군단인 히카나토이의 명목상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813년 아버지 미하일 1세가 폐위된 뒤 레온 5세는 니키타스가 황위에 오를 수 없도록 강제로 거세시킨 뒤 수도원에 가두었다. 니키타스는 수도자로서 이그나티오스라는 이름을 취했는데 나중에는 수도원장이 되었다. 삭발한 황실 구성원들의 전통적 추방지인 프린스 제도에 3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황후 테오도라는 84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메토디오스 1세의 뒤를 이어 성상파괴주의에 대한 확고한 반대자인 이그나티오스를 임명했다. 이그나티오스는 곧 성상파괴운동을 매듭짓기 위한 문제를 두고 강경파 스투디오스파와 교회의 온건파 사이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문제는 과거에 우상 파괴 정책에 협력했던 성직자들을 해임할지 여부였다. 이그나티오스는 보수적인 스투디오스파의 편을 들었고 시라쿠사의 대주교이자 온건파의 지도자인 그리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를 면직시켰다. 그리고리오스 아스베스타스는 교황 레오 4세에게 시정을 호소했고, 그리하여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사이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카이사르 바르다스가 자기 며느리와 저지른 부적절한 관계를 열렬히 비판했다. 또 황후 테오도라를 쫓아내기 위해 테오도라의 삭발식을 청한 바르다스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황제 미하일 3세와 바르다스는 857년 테오도라를 궁정에서 몰아내자 지지를 잃었다. 결국 이그나티오스는 85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서 사임할 것을 강요받았고 평신도 포티오스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85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고 861년에 다시 열린 공의회에서 논의되었다.[1] 포티오스가 전임자의 정책 중 일부를 철회하려 할때, 이그나티오스의 지지자들은 교황 니콜라우스 1세에게 나타났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처음에 논쟁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863년에 포티오스를 비난했다. 분쟁에서 당면한 문제는 총대주교에 대한 교황의 우선권 문제와 기독교로 개종한 불가리아에 대한 관할권이었다.
867년 마케도니아인 바실리오스 1세가 미하일 3세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바실리오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루도비코 2세와 니콜라우스 1세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포티오스를 추방하고 이그나티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앉혔다. 재착좌한 이그나티오스는 포티오스의 노선을 따랐고 870년에는 불가리아의 군주를 설득하여 불가리아에서 라틴 의식의 위계를 추방시켰다.[2] 이그나티오스와 포티오스가 같은 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포티오스는 다시 소환되어 황제의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복귀했다.
그에 대해 로마 순교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그나티오스 주교는 카이사르 바르다스가 자신의 아내를 버리자 책망했지만, 많은 부상을 입고 추방되었다. 니콜라우스 교황에 의해 되찾아, 마침내 그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3] 877년 10월 이그나티오스가 사망했을 때,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복직되었고, 이그나티오스의 시성화에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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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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