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쾨세다그 전투

몽골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난 룸 술탄국과의 전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쾨세다그 전투
Remove ads

쾨세다그 전투는 현대 터키 북동부의 에르진잔귀뮈샤네 사이의 위치인 쾨세다그(Köse Dağ)의 협곡에서 셀주크 왕조가 통치하는 룸 술탄국몽골 제국 사이에 1243년 6월 26일에 벌어진 전투였다.[10][11] 몽골군은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간략 정보 쾨세다그 전투, 날짜 ...
Remove ads

배경

오고타이 칸 재위 기간 동안 룸 술탄국은 케식이자 몽골의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인 en:Chormaqan과 우정을 쌓고 겸손한 헌사를 바쳤다.[12] 그러나 카이쿠스로 2세(영어판) 통치 기간의 몽골인들은 술탄에게 몽골에 가서 직접 인질을 보내고 몽골의 다루가치를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투

몽골군 사령관 바이주 노얀의 휘하의 몽골군은 1242~1243년 겨울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에르주룸를 점령하였다. 술탄 카이쿠스로 2세는 즉시 이웃 국가들에게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트라페주스 제국은 군대를 보냈고 술탄은 프랑크인 용병단을 고용했다.[13] 아할치헤의 파라다블라, 다딘 셰르바시체(영어판) 등 그루지야 귀족 몇 명도 그와 합류했지만 대부분의 조지아인들은 몽골의 지배층과 함께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243년 6월 26일 쾨세다그에서 치러졌다. 대부분의 매체는 상대군의 규모를 기록하지 않고 몽골군이 수적으로 우월한 군대와 맞닥뜨렸음을 시사한다.[14] 바이주 노얀는 룸 술탄국 군대의 규모에 대해 조지아 장교가 적의 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하고 "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승리하는 것이 영광이며, 우리가 약탈을 더 많이 확보하게 될 것이다."라며 우려되는 통고를 무시했다.[15]

카이쿠스로 2세는 몽골군의 공격을 기다리라는 경험 많은 지휘관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들이 이끄는 2만 명의 병력을 몽골에 파병시켰다.[7] 몽골군은 퇴각한 척 뒤로 돌아서서 룸 술탄국의 군대를 포위하고 격파했다.[9]

나머지 룸 술탄국 군대는 그들이 패배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카이쿠스로 2세를 비롯한 룸 술탄국 지휘관들과 그들의 병사들은 전장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했다.[7] 결국 룸 술탄국 군대는 지도자들 없이 남겨졌고 그들의 대부분의 군인들은 아무런 전투도 보지 못한 채 버려졌다.[7][9]

승리한 몽골군은 시바스카이세리를 장악했다. 술탄은 안탈리아로 도망갔으나, 그 후 바이주 노얀과 화해하고 몽골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Remove ads

전투의 여파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아나톨리아에 혼란의 시기가 도래했고 셀주크인 국가의 쇠퇴와 해체로 직결되었다. 트라페주스 제국은 몽골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나아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또한 몽골의 속국이 되었다.[16] 아나톨리아에 대한 권력은 이제 몽골 제국으로 바뀌게 되었다.[17]

각주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