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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독립

현대 크로아티아의 독립 과정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크로아티아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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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독립은 1990년 정치 체제와 헌법 변화로 시작된 과정으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고 이어서 크리스마스 헌법을 선포하고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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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으로 선출된 초대 대통령이자 현대 독립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가 1991년 6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해체한 후, 유럽 공동체유럽 안보 협력 회의의 요청에 따라 독립 결정에 대한 3개월 유예를 도입했다. 그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1991년 10월 8일, 크로아티아 의회는 유고슬라비아와의 모든 잔존 관계를 단절했다. 유고슬라비아 평화 회담 중재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판결해야 했다. 마침내 1992년 1월, 유럽 경제 공동체유엔이 크로아티아에 국가승인을 부여하면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직후 크로아티아는 유엔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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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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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의회 건물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정권으로 수립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왕국 영토 내에서 국수주의파시즘 단체인 우스타샤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통치했다. 1945년부터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사회주의 연방 단위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결성된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동맹이 통치하는 일당제 국가였다.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에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누렸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크로아티아의 봄이라는 크로아티아 민족 시위 운동이 유고슬라비아 지도부에 진압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은 연방 단위에 대한 자율성을 높여 사실상 크로아티아의 봄의 목표를 달성하고 연방 구성체의 독립을 위한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2]

198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의 정치 상황은 1986년 세르비아 SANU 각서1989년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의 쿠데타로 인해 민족 갈등이 고조되면서 악화되었다.[3][4]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 내에서 더 큰 자치권, 국가 연합 지위, 심지어 완전한 독립까지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여전히 집권 중인 공산주의자동맹 내에서도 민족주의 사상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밀로셰비치의 연설은 모든 권력이 베오그라드에 집중되는 통일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지속을 지지했다.[5][6] 1989년 3월에는 세르비아 헌법 개정안이 채택되어 세르비아 공화국 정부가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대한 실질적인 권력을 다시 주장할 수 있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는 심화되었다. 그 전까지는 이들 자치주 내에서 많은 정치적 결정이 입법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직 수준(공화국 6명, 자치주 2명)에서 투표권을 가졌다.[7]

1989년 6월 28일 가지메스탄 연설에서 밀로셰비치는 현재의 "전투와 다툼"에 대해 언급하며, 비록 현재 무력 충돌은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8] 1989년 보이슬라브 셰셸이 제2차 세계 대전 체트니크 지도자 몸칠로 주이치와 공개적으로 교류하면서 전반적인 정치 상황은 더욱 긴장되었다.[9] 몇 년 후, 크로아티아 세르브인 지도자 밀란 바비치는 몸칠로 주이치가 1990년대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고 증언했다.[10] 반대로, 프라뇨 투지만은 1980년대 후반에 크로아티아 국가 대의를 위한 크로아티아 디아스포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제 방문을 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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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로의 전환과 정치 위기

1989년 중반, 공산당 이외의 정당이 처음으로 허용되면서 일당제에서 다당제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크로아티아어: 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 HDZ)를 포함하여 여러 신당이 크로아티아에서 창설되었다.[12]

1990년 1월, 공산당은 민족 노선을 따라 분열되었고 크로아티아 파벌은 느슨한 연방제로 전환을 요구했다. 1990년 1월 20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제14차 임시총회에서 각 공화국 대표단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요 쟁점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대표단은 느슨한 연방을 요구했지만,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대표단은 이에 반대했다. 그 결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대표단은 총회를 떠났다.[6][13][14]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에서 반관료제 혁명을 완수한 세르비아는 1991년 8개의 연방 대통령 투표 중 4개를 확보했으며,[6] 불리한 결정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연방 수준에서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통치 기관은 비효율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공화국의 반발과 유고슬라비아 연방 개혁 요구로 이어졌다.[15]

1990년 2월, 요반 라슈코비치크닌세르브인 민주당 (SDS)을 창설했다. 그들의 강령은 "크로아티아의 지역 구분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세르비아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16] 당 강령은 지역 및 지방 자치 단체의 경계를 해당 지역의 민족 구성에 따라 다시 그릴 것을 지지하고 "특별한 민족 구성"을 가진 지역이 자치권을 가질 권리를 주장했다. 이는 모든 세르브인이 단일 국가에 살 수 있도록 유고슬라비아 내부 국경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밀로셰비치의 입장과 일치했다.[17] SDS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밀란 바비치밀란 마르티치가 있었는데, 둘 다 나중에 RSK의 고위 관리가 되었다. 나중에 바비치는 재판에서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이 크로아티아인 다수로부터 민족 청소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미디어 선전이 지시되었으며, 자신도 이 선전에 희생되었다고 증언했다.[18] 1990년 3월 4일, 페트로바고라에서 5만 명의 세르브인 회의가 열렸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투지만을 겨냥한 부정적인 발언을 외치고,[16] "여기는 세르비아다"라고 외치며,[16] 밀로셰비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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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움직임과 시민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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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4월 말과 5월 초, 크로아티아에서 첫 다당제 선거가 열렸고, 프라뇨 투지만의 승리는 더욱 큰 내셔널리즘적 긴장을 초래했다.[12]

1990년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1990년 5월 13일, 자그레브에서 디나모 자그레브 팀과 베오그라드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팀 간의 축구 경기가 자그레브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축구 팬과 경찰 간의 폭력으로 번졌다.[21]

1990년 5월 30일, 새로운 크로아티아 의회가 첫 회의를 열었다. 투지만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과 주권 국가 연합으로서의 유고슬라비아 계획을 포함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변화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했다.[22]

1990년 7월 25일, 크로아티아는 주권을 주장하고 실행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에는 국가 이름에서 "사회주의" 접두사를 삭제하고,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대통령직 의장을 대체하는 등의 변화가 포함되었다.[23] 1990년 7월 크로아티아 헌법 개정은 세르브인의 지위와는 관련이 없었다. 세르브인의 지위는 1974년 크로아티아 헌법(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기반)에서 부여된 것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24]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민족주의자는 크로아티아 의회를 보이콧하고 세르브인 거주 지역의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도로를 봉쇄하고 해당 지역의 자주권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세르브인 "자치주"는 곧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더욱 강력히 추구하게 되었다.[25][26][27][28]

HDZ가 집권한 후 공공 행정, 특히 경찰에 고용된 세르브인을 숙청했다.[29]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은 불균형적으로 많은 공직을 차지했다. 1984년에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동맹 구성원의 22.6%와 크로아티아 임명 공무원의 17.7%가 세르브인이었고, 내무부(경찰)에서는 28-31%를 차지했다.[30][31] 반면 1981년에는 크로아티아 전체 인구의 11.5%[31]였고 1991년에는 12.2%였다.[32] 이전에는 이보다 더 많은 비율의 직책이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이 차지했고, 이는 세르브인이 공산주의 정권의 수호자라는 인식을 만들어냈다.[30]

투지만 대통령은 1990년 4월 16일 연설에서[33] "아내가 세르브인이 아니어서 기쁘다"는[34] 등 몇몇 어색한 발언을 했는데, 크로아티아의 역사학자 안테 나조르는 이를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묘사했다.[33] 이 모든 것은 밀로셰비치의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독립 크로아티아의 어떤 형태든 새로운 "우스타샤 국가"라는 인위적인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베오그라드 TV는 투지만이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악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제4제국"을 강요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했다.[35] 새로운 투지만 정부는 민족주의적이었고 세르브인에게 무감각했지만, 전쟁 전에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36]

세르브인이 거주하는 지역이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분리되려고 할 경우 크로아티아로부터 분리될 의도를 가진 세르비아 크라이나라는 고립 지역을 형성하려 시도하면서 정치 위기는 확대되었다. 크라이나의 세르브인 지도부는 크로아티아 공화국 정부가 그들에게 주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위기는 1990년 8월 통나무 혁명으로 시작되었는데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이 나무를 베어 도로를 봉쇄했다.[25][37] 이는 크로아티아 관광에 지장을 주었고, 크로아티아가 스플리트에서 1990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마티아 지방에 경보를 울렸다.[38]

1990년 12월 21일, 새로운 "크리스마스 헌법"이 통과되어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했다.[39] 헌법은 크로아티아를 "크로아티아 민족의 국가이자 시민인 다른 민족 및 소수민족 구성원의 국가로서, 세르브인...에게 크로아티아 민족 시민과 사회적 평등이 보장된다"고 정의했다.[40] 세르브인의 지위는 명시적으로 언급된 민족(narod)에서 소수민족과 함께 나열된 민족(narodi i manjine)으로 변경되었다.[24] 이 헌법 개정은 대부분의 세르브인 정치인이 이전 사회주의 헌법에 의해 세르브인에게 부여되었던 일부 권리가 박탈되는 것으로 해석ㅎㅆ고,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 사이에서 극단주의를 부추겼다.[41] 하지만 이는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인에게는 "민족 국가", 세르브인과 다른 소수민족에게는 "국가"라고 명시하며 크로아티아인만을 구성 민족으로 취급했던 SR 크로아티아의 이전 헌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24]

1991년 2월 21일, 크로아티아는 헌법과 법률이 SFRY의 헌법과 법률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했으며,[42] 의회는 SFR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분리(크로아티아어: razdruženje) 과정과 다른 주권 공화국과의 가능한 새로운 연합에 대한 공식 결의안을 제정했다.[43]

1990년 8월부터 1991년 4월까지 반군 세르브인과 크로아티아 경찰이 관련된 200여 건 이상의 무장 충돌이 보고되었다.[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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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국민투표 및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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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당국은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했다.[45] 세르브인 지방 정부는 투표 보이콧을 촉구했고, 이는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이 대체로 따랐다.[46] 결국,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인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투표율은 83.56%였고, 두 개의 국민투표 질문에 대해 전체 투표수의 93.24%와 92.18%가 각각 긍정적으로 답변했다.[47]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는 SFRY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며 구성 공화국에서 탈퇴하는 내부 절차를 마무리했다.[48][49][50] 의회의 이 결정은 좌파 정당 의원이 부분적으로 보이콧했다.[51]

유럽 경제 공동체유럽 안보 협력 회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모두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시 촉구했다.[52] 1991년 중반에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53]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이 통제하는 지역은 나중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으로 알려진 세 개의 "세르브 자치주"의 일부였으며,[54] 그 대부분은 1995년까지 크로아티아의 통제하에 들어가지 않았고,[55][56] 나머지는 1998년까지 세르브인이 통제했다.[57]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6일, 크로아티아와 같은 날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에게서 처음으로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48] 그러나 6월 29일까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정부는 긴장 완화를 위해 독립 선언에 대해 3개월간의 모라토리엄에 동의했다.[58] 브리유니 협정은 7월 7일 유럽 공동체 장관 트로이카,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당국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서명되었다.[59] 리투아니아만이 7월 30일에 크로아티아를 인정한 유일한 국가였다.[60]

유럽 경제 공동체 (EEC) 각료이사회는 1991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 평화 회담 중재위원회를 설치하여 옛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에 대한 법률 자문과 승인 기준을 제공했다.[61] 5인 위원회는 EEC 내 헌법재판소장들로 구성되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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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8일 의회의 독립 선언 장소로 보안상의 이유로 자그레브 슈비체바 거리INA (기업) 빌딩이 선정되었다.

모라토리엄 만료 전날인 10월 7일, 유고슬라비아 공군자그레브의 주요 크로아티아 정부 건물인 반스키드보리를 공격했다.[63][64] 1991년 10월 8일, 모라토리엄이 만료되었고, 크로아티아 의회는 유고슬라비아와의 모든 잔존 관계를 단절했다.[65] 의회의 이 특별 회의는 최근 유고슬라비아 공습으로 인한 보안 문제 때문에 자그레브의 파블로슈비치 대로에 있는 INA 건물에서 열렸다.[66] 특히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의사당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67] 이 결정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1991년 초부터 부재했던 세르브 정당의 일부 의원들만 불참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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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국가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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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세르브인 거주 지역에서 진행 중인 폭력을 막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신속한 국가승인을 주장했으며, 헬무트 콜은 9월 4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승인을 요청했다. 콜의 입장은 프랑스, 영국[69], 네덜란드가 반대했만, 이들 국가는 독일의 일방적인 조치에 따라 공동 접근 방식을 취하기로 합의했다. 10월 10일, 크로아티아 의회가 독립 선언을 확인한 지 이틀 후 EEC는 크로아티아를 승인하는 결정을 두 달 동안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외무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나중에 전쟁이 그때까지 끝나지 않으면 EEC가 두 달 안에 크로아티아 독립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고 썼다. 기한이 만료되었을 때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므로, 독일은 크로아티아 승인을 자국의 정책이자 의무로 제시했다. 독일의 입장은 이탈리아와 덴마크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와 영국은 유고슬라비아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유엔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일의 승인을 막으려 시도했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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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바댕테르유고슬라비아 평화 회담 중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991년 11월 말부터 바댕테르 위원회는 일련의 10가지 의견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과정에 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내부 국경은 자유롭게 합의되지 않는 한 변경될 수 없다고 밝혔다.[62] 크로아티아의 전전 국경 유지를 위한 요인은 1971년과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헌법 개정안으로, 주권이 연방 단위에 의해 행사되고 연방은 헌법에 의해 특별히 위임된 권한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2][71] 국경은 1947년에 경계 위원회에서 정의되었다.[72]

결국 프랑스와 영국은 12월 14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논쟁에서 독일이 유엔 결의안을 무시할 의지를 보였을 때 물러섰다. 12월 17일, EEC는 크로아티아의 요청과 바댕테르 중재 위원회의 긍정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1992년 1월 15일에 크로아티아에 국가승인을 공식적으로 부여하기로 합의했다.[70]

크로아티아 독립이라는 특정 문제에 대한 의견 5호에서 위원회는 새로운 크로아티아 헌법이 유럽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소수민족 보호 조항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의 독립은 아직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에 대해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로베르 바댕테르에게 이 결함을 시정하겠다고 확신하는 서한을 보냈다.[73]

우크라이나라트비아는 12월 둘째 주에 크로아티아 독립을 인정하며 가장 먼저 반응했다.[60] 다음 주에는 아이슬란드와 독일이 1991년 12월 19일, 서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크로아티아를 인정했다.[60]

바댕테르 위원회의 결정에 대응하여 RSK는 12월 19일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지만, 그 국가성과 독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74] 12월 26일,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중 크로아티아로부터 점령한 영토를 포함할 수 있는 더 작은 국가 계획을 발표했다.[75] 이 계획은 유엔 총회에서 거부되었다.[76]

EEC가 예정한 1월 15일 이전에 에스토니아, 성좌, 산마리노 세 국가가 크로아티아를 인정하기로 결정했다.[60] 유럽 경제 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에 마침내 크로아티아에 국가승인을 부여했으며, 유엔은 1992년 5월에 그렇게 했다.[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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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

독립 선언 이후 전쟁은 확대되어 부코바르 포위전[79]두브로브니크 포위전[80], 그 외 다른 곳에서의 전투가 이어졌고, 1992년 1월 3일 휴전으로 안정화되고 폭력이 크게 감소했다.[81]

1991년 말에 제2차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91년 12월 안테 마르코비치 총리와 대통령직 의장 스테판 메시치가 사임했고,[82] 1992년 4월 국가가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과도정부가 이를 대표했다.[83]

이 전쟁은 1995년 8월 폭풍 작전의 결정적인 크로아티아 승리로 사실상 종결되었다.[56] 크로아티아는 1995년 11월 에르두트 협정에 따라 동슬라보니아의 남은 세르브인 점령 지역이 크로아티아로 복귀하면서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으며, 이 과정은 1998년 1월에 마무리되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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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2002년부터 10월 8일은 크로아티아 독립기념일로 기념되며, 6월 25일은 국경일로 인정된다.[84][85] 이전에는 1990년에 첫 민주 의회가 구성된 날인 5월 30일이 국경일로 기념되었다.[86][87]

공휴일은 아니지만, 1월 15일은 크로아티아가 국제적 인정을 받은 날로 크로아티아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기념된다.[88] 2002년 이 날의 10주년을 맞아 크로아티아 국립은행은 25 크로아티아 쿠나 기념주화를 발행했다.[89]

상징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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