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크로아티아-세르비아 학살 재판

크로아티아와 구유고슬라비아 사이 벌어졌던 상호 소송 사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크로아티아-세르비아 학살 재판
Remove ads

집단학살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적용 사건 (크로아티아 대 세르비아)(Application of 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roatia v. Serbia))[1]국제사법재판소에서 심리된 사건이다.

간략 정보 집단학살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적용 사건 (크로아티아 대 세르비아), 법원 ...

크로아티아 공화국집단학살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제9조를 인용하며 1999년 7월 2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2] 이 소송은 미국 변호사 데이비드 리브킨이 크로아티아를 대신하여 제기했다.[3]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변모하고 2006년 이 국가가 해체되면서, 세르비아는 그 법적 승계국으로 간주된다.

세르비아 공화국은 2010년 1월 4일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집단학살 혐의로 기소하는 반소장을 제출했다.[4] 이 소장은 실종자, 사망자, 난민, 추방된 사람,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세르브인 집단학살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우스타샤가 저지른 모든 군사 행동과 강제 수용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다룬다.[5]

두 소장 모두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재정적 요구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개시 변론은 2014년 3월 3일 월요일에 시작하여 2014년 4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6][7] 2015년 2월 3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모두 상대방이 집단학살을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결하여 두 사건을 모두 기각했다.[8]

Remove ads

사실 관계

요약
관점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인 집단학살 재판이 종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체 소송을 진행했다. 보스니아 사건에 참여했던 사킵 소프티치(Sakib Softić)는 크로아티아가 자국의 소송에서 보스니아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밝혔다.[9]

선결항변 제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2002년 9월 1일 선결항변을 제기했다.[10] 2008년 11월 18일, 법원은 세르비아가 제기한 사건에 대한 선결항변에 대해 결정했다. 법원은 세르비아의 세 가지 항변을 기각했으며, 이 중 하나는 순수하게 선결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관할권이 있다고 판결했다.[2] 크로아티아는 법무부 장관 이반 시모노비치가 대리했다.[11] 이 결정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었으며, 특히 1991년 부코바르 함락 기념일에 발표되어 세르브인 군대에 더욱 주목받았다.[12] 크로아티아는 1995년 이래로 주로 동슬라보니아, 달마티아크닌에서 최소 120개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13]

세르비아 관료는 크로아티아가 여러 차례 소송에서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14][15] 당시 세르비아의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은 "세르비아는 지난 수년간 1990년대 전쟁으로 인한 모든 갈등을 사법 외적인 과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항상 더 낫다고 여겨왔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세르비아의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상대방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외무부 장관 부크 예레미치는 "이 과정이 결코 오지 않는 것이 크로아티아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주된 목표와 바람은 서로를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EU 통합의 길에서 협력하고, 좋은 이웃 관계를 구축하며, 우리가 물려받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6][17] 2013년 11월 세르비아의 이비차 다치치 총리는 양국 간의 소송 상호 철회 의사를 다시 한번 밝혔다.[18]

세르비아 대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사건에 대한 관할권이 있다는 법원 판결에 따라 세르비아 외무부 장관 부크 예레미치는 크로아티아에 대한 반소장을 제출할 계획을 발표했다.[19] 소장은 2010년 1월 4일에 제출되었다. 이 문서는 고스피치, 시사크, 파크라츠, 카를로바츠, 오시예크, 파울린드보르에서 세르브인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 및 섬광 작전, 폭풍 작전, 메다크 포위 작전 중의 범죄에 대한 정보를 포함했다. 또한 소송은 전쟁 후 난민으로 떠났던 집으로 돌아가려다 살해된 모든 희생자를 다루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소송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브인 박해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 기록을 포함했다.[4]

블리츠》가 세르비아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69.7%의 사람들이 반소에 찬성했고, 9.1%는 반대했다.[20] 이 소송은 소수 야당인 자유민주당의 지도자가 "세르비아는 지난 세기에 크로아티아가 저지른 실수에 실수로 대응하지 않을 현명한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반대했다.[21][22]

세르비아의 토미슬라브 니콜리치 대통령은 2014년 1월 집단학살 소송의 상호 철회를 촉구했다.[23]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와의 관계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의 검찰 대 고토비나 외 사건의 최종 판결이 유죄 판결의 뒤집힘(사실상의 무죄)이었기 때문에, 일부 독일 언론은 이로 인해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추측했다.[24]

연표

자세한 정보 날짜, 사건 ...
Remove ads

같이 보기

각주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