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틈관동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틈관동(중국어 간체자: 闯关东, 정체자: 闖關東, 병음: chuǎng Guāndōng 촹관둥[*])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약 100년 동안 한족만주로 대거 이주한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이주자는 주로 산동 반도직례(直隸) 출신이었다. 만주족이 다스리던 청나라 초 2세기 동안, 이 지역은 만주족 황조의 전통적인 고향으로서 보호되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한족 민간인의 정착이 금지되었으며, 만주족, 몽골족, 한족의 특정 팔기(八旗)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틈관동의 결과로, 한족은 현재 만주(둥베이) 지역에서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요약
관점
Thumb
(炕)에 앉아있는 이주민과 여행자들. 당시 황무지이던 길림성 통화시 동쪽 지역의 한 방짜리 여관의 내부 모습으로, 1887년 헨리 E.M. 제임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래 관동(關東, 곧 만리장성 동단의 산해관의 동쪽이라는 데서) 또는 관외(關外)라고도 불리던 만주는 주로 퉁구스족이 거주하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이었다. 1668년 강희제 통치 기간에 청나라 조정은 팔기군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더욱 강하게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청나라 통치 기간 동안 점점 많은 수의 한족이 불법적으로든 합법적으로든 만주로 유입되어 토지를 경작하며 정착하는 경우가 급증했는데, 이는 만주족 지주들이 한족 농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빌려주어 곡물을 재배하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족 이주민들은 만리장성과 유조변을 넘어가고도 쫓겨나지 않았다. 18세기 동안 한족은 만주에서 500,000 헥타르에 달하는 사유지와 역참, 귀족 영지, 팔기군 소유지인 203,583 헥타르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한족은 수비대와 도시 인구의 80%를 차지했다.[1]

청나라는 한족 농민들을 북중국에서 요하 유역으로 재정착시켜 경작지를 복구시키기도 하였다.[2] 만주족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빌린 다른 한족들 외에 한족 불법 거주자들도 황무지를 개간했다.[3] 만주와 몽골 땅에 대한 한족 정착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까지 청나라는 기근, 홍수, 가뭄으로 고통받던 북중국 출신 한족 난민들을 만주와 내몽골에 정착시켰다. 1780년대까지 한족은 만주에서 500,000 헥타르, 내몽골에서 수만 헥타르를 경작했다.[4] 건륭제는 1740년부터 1776년까지 이들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뭄에 시달리던 한족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5] 한족 소작농들은 해당 지역의 "황실 영지"와 만주 팔기군 영지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6] 만주 남부의 요하 지역 외에도, 건륭제 치세 동안 한족들은 금주, 봉천, 철령, 장춘, 후룬, 닝구타를 잇는 길에 정착하었다. 1800년까지 한족은 만주 도시지역의 다수를 차지하였다.[7] 또한 청나라는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도광제 통치 초기 쑹화강을 따라 있던 만주 토지들을 한족에게 매각했으며, 아베 위크(Abbé Huc)에 따르면 1840년대까지 만주 대부분의 도시는 한족으로 채워졌다.[8]

청 제국 북동부 국경 지역의 희박한 인구는 러시아 제국에 의한 외만주(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병합(아무르 병합)을 용이하게 했고, 이는 아이훈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859년에서 1867년까지 헤이룽장성의 군사 총독이던 터푸친(特普欽)과 같은 청나라 관리들은 추가적인 러시아의 병합을 막기 위해 관동의 일부를 민간의 한족 농민 정착민들에게 개방할 것을 1860년 제안했다.[9] 청나라 정부는 이후 정책을 변경하여 인근 직례성(현재의 허베이성)과 산동성의 빈농들의 만주 이주를 장려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지역이 공식적으로 새 정착에 개방되었다.

이주민의 정확한 수는 다양한 이동 방식(일부는 도보로 이동함)과 당시 행정 통계 조직의 미비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해관과 이후 남만주 철도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현대 역사학자 토머스 고츠샹(Thomas Gottschang)과 다이애나 래리(Diana Lary)는 1891년에서 1942년까지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에서 만주로 약 2,540만 명의 이주민이 도착했고, 그 중 1,670만 명이 돌아갔다고 추정한다. 즉 이 반세기 동안 870만 명의 순이동 인구가 있었다는 것이다.[10]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주로 산동 출신의 가난한 농민들이었으며, 산해관을 통해 육로로 이동하거나 북양수사가 산동 반도의 웨이하이요동 반도뤼순에 주둔하면서 운항되던 옌타이-뤼순 페리를 이용하여 해로로 이동했다.

Remove ads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