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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미사일 연구 개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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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프 프로그램(우르두어: حتف)[1]은 파키스탄 국방부의 유도 미사일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 및 개발을 위한 비밀 프로그램이었다.[2][3] 이 프로그램은 1986-87년에 시작되었으며, 1989년 인도의 유사 프로그램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지원을 받았다.[4][5]
하트프 프로그램은 파키스탄 국방부가 운영했지만, 정책 지침은 파키스탄군의 합동참모본부에서 직접 나왔다.[1]
프로그램 개요
요약
관점
1985-87년에 인도의 공개된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응하여 프로그램 계획 및 착수가 시작되었다.[1]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M. A. 베그 장군은 이 프로그램을 서둘러 시작했으며, SUPARCO가 주도하도록 의도했다.[6]
이 프로그램은 어려운 자금 조달과 제어 시스템 및 공기역학 연구에 대한 부족으로 인해 핵무기 프로그램보다 더 어려웠다.[6] 러시아 로켓에 기반한 기존 지식을 가진 인도는 이미 미사일 기술에서 앞서 있었고, 자체적으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다.[6] 게다가 1987년에 결성된 미사일 기술 통제 체제 (MTCR)는 파키스탄이 프로그램 부품을 획득하는 시도를 방해했다.[6][7]
국방부는 결국 하트프 프로그램을 인수하여 무기 연구소와 기관에 위임하여 SUPARCO와 협력하도록 했다.[8] 1989년 인도는 1983년부터 자체적으로 개발해 온 프리트비 미사일의 첫 번째 개량형을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했다.[6] 같은 해, SUPARCO는 하트프를 시험 발사했고,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즉시 성공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군은 이 미사일을 "성능이 부정확한 미사일"로 간주하고 결과를 일축했다.[6]
베나지르 부토 총리 하에 하트프 프로그램은 인도와의 미사일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7][9] 베나지르 부토 정부는 중국과 나중에 북한과 로켓에 대한 공학 교육 및 훈련을 협상했다.[10] 파키스탄 군 관계자들은 파키스탄이 항공우주 공학, 제어 공학, 프로그래밍 및 우주 과학 분야의 실용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국립은행을 통해 중국과 북한에 상당한 현금 지불을 했다고 문서화했다.[6][11]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트프 프로그램은 실현 가능해졌고,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는 개발 당시 여러가지 도움을 준 것으로 묘사된다.[12] 2014년, 전 총리 유사프 라자 길라니는 베나지르 부토의 공헌을 인정하며 "베나지르 부토는 이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미사일 기술을 제공했다"고 말했다.[13]
이 프로그램은 결국 2000년대 초 순항 미사일 및 기타 전략 수준의 무기고 성공적인 개발로 확장되고 다양화되었다.[14]
미국 본토를 겨냥한 ICBM 개발
파키스탄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핵 탑재 대륙간 탄도 미사일 (ICBM) 개발 노력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개발이 확인되면 이슬라마바드의 전략적 역량에 큰 도약을 의미하며, 미국의 전략 평가에서 파키스탄의 분류를 변경하여 공식적으로 핵 적대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파키스탄의 미사일 연구 및 개발 프로그램의 궤적과 범위에 대한 국제적 우려가 커지고 있음을 강조한다.[15]
코드명
파키스탄군은 모든 지대지 유도 탄도 미사일에 대해 단일 군사 지정 시리즈인 하트프 (전사: 목표)를 발표했다.[1] 이 명칭은 프로그램에 대한 정책 지침을 제공한 파키스탄 육군의 육군 본부 연구 개발 위원회에서 선정했다.[1] 튀르키예어로 "하트프"는 "목표" 또는 "조준"을 의미하며, 무함마드의 검을 가리키는데, 이는 목표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1]
가우리, 가지나비, 압달리와 같은 비공식 명칭은 국방 계약업체에 할당된 개발 프로젝트의 코드명이었다. 이 명칭은 이슬람의 남아시아 정복에 참여한 역사적 인물에서 유래했다.[16] 계약업체는 대코라산 지역에서 인도를 침략한 튀르키예 유목민의 이름을 따서 프로젝트 이름을 부여받았다.[16]
전술 미사일 개발
하트프-I (영어: "목표")은 1987년 이 프로그램 하에 개발된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 파키스탄 육군에 배치된 하트프-I은 SUPARCO가 개발한 단거리 탄도 미사일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인도의 프리트비 시스템과 직접 경쟁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0]
파키스탄 행정부의 성공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군은 미사일 시스템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2000년에 군사 서비스에 진입할 때까지 프로그램이 보류되었다고 인정했다.[6] 서방 평가자들은 이 시스템이 SUPARCO가 원래의 민간 우주 프로그램의 일부로 연구한 미국 및 프랑스 우주 로켓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믿었다.[21][22]
하트프-I에서 얻은 교훈과 경험은 결국 2011년 나스르의 설계 및 개발로 이어졌으며, 이는 소형 전술 핵무기의 운반 시스템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단거리 시스템은 파키스탄 육군을 위해 독점적으로 설계 및 배치된다.[16]
단거리-중거리 개발

지아 행정부는 구 아프가니스탄군으로부터 소련의 스커드 기술을 획득했지만, 이는 단거리 미사일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파키스탄 과학자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235–244[6] 1993년 베나지르 부토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DF-11을 비밀리에 조달하기 시작했다.[23] 중국의 단거리 미사일은 핵무기 운반 능력이 없었지만, 운반 메커니즘을 역설계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235–244[6]
1995년 파키스탄은 중국의 항공우주 및 제어 공학 기술 지원과 교육을 받아 고체 연료 플랫폼 기반의 단거리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235–244[6] M-11의 배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압달리 프로그램은 1995년 SUPARCO에 의해 설계 및 구현되었으며, 가지나비 프로그램은 M-11 설계를 기반으로 시작되었다.[6][23] 1997년에 시험된 가지나비의 로켓 엔진은 중요한 돌파구였다.[23]
이 시기에 샤힌 프로그램은 NDC에 의해 추진되고 개발되었다. 기술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샤힌 프로그램은 계속 발전하여 1999년에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생산했다.[24] 이 프로그램은 지속 가능하다고 입증되었고, 개선된 변형을 생산했다.[25] 아바빌은 인도의 미사일 방어를 막기 위해 MIRV 능력을 가지고 개발되었다.[26]
하트프 프로그램은 액체 로켓 기술로 다각화되었으며, KRL이 주도했다. 이 프로그램의 기술은 베나지르 부토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직접 받아 왔다.[27] 파키스탄 군의 인정에 따르면 베나지르 부토 총리 하의 재무부는 북한 과학자들이 파키스탄 대학에서 항공우주 공학을 가르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이동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북한에 상당한 현금을 지불했다.[6] 원래는 전적으로 로동-1을 기반으로 한 가우리 프로그램은 북한 엔지니어들의 지도를 받아 설계되었으며, 1998년에 첫 비행을 했지만 엔진 고장과 결함 설계로 인해 실패했다.[28]
1998년 첫 비행 실패 후, 북한 엔지니어들은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고, KRL은 전체 무기 시스템을 역설계하고 재설계해야 했다. DESTO와 NDC의 도움으로 첫 번째 미사일인 가우리-I은 2004년에 배치되었다.[28][29]
순항 미사일 기술

순항 미사일 기술 이해 및 개발은 인도가 1998년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파키스탄에서 시작되었다. 샤리프 행정부, 바지파이 총리 및 클린턴 행정부 간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 파키스탄의 순항 미사일 개발은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S-300 그룸블을 획득하고 미국과 패트리어트 PAC-3 협상을 시도하면서 촉발되었다. [6]
파키스탄이 순항 미사일 프로그램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2005년, 첫 번째 바부르가 육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되었고, 이는 미국을 놀라게 했다.[30] 2007년, 파키스탄은 라드의 개발 및 시험 발사를 발표하며 공중 발사 순항 미사일 능력을 시연했다.[31]
2017년 파키스탄은 잠수함에서 발사 가능한 바부르-III 미사일의 성공적인 발사를 수행했다. 해군에 대한 이 오랫동안 염원했던 능력은 바다로부터의 제2격 능력을 효과적으로 확립했다.[32][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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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칸 연구소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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