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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러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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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러 신학교 (Fuller Theological Seminary)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있는 초교파 기독교 신학교이다. 90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2897명 그리고 110개의 교파에 소속된 학생들이 있다 .[1][2] 1947년 래디오 전도자 찰스 풀러와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신학자 헤롤드 오켄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3] 학교는 근본주의적 분리주리와 반지성주의를 개혁하는 신복음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역사
요약
관점
풀러신학교의 주요 신학 노선인 신복음주의는 신학교육을 거부하고 극단적으로 기독교 타종파, 진보 신학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 사회참여에 눈감은 1920년대식 '기독교 근본주의', 이와 더불어 지나치게 사회참여, 기독교 타종파와의 화합, 타종교와의 대화, 과학적 사고에 집중하던 '기독교 자유주의'에 모두 피로감을 느낀 이들이 고안한 사상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미국은 다소 보수적으로, 영국은 조금 더 부드럽고 중도~중도 진보에 가까운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상에 기반한 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복음주의는 최대한 여러 사상을 포용하지만 자유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다만 신정통주의(성경을 읽을 때 말씀이 된다고 하는 사상)에는 열려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1920년대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극단적인 갈등이 복음의 본질을 가렸음을 지적한다. 1920년대의 갈등이란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 재림을 중심으로 만든 1910년의 북장로교 선언과 자유주의자들의 '어반 선언'의 대립을 의미한다. 굳이 따지자면 신복음주의는 보수적인 신학 입장에 더 가깝다.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근본>이라는 책자를 만들고 이후 칼 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모였다. 이에 대해 이들이 지나치게 정통 신학보다는 자의적 신앙에 빠졌다고 간주한 신복음주의자들은 'NAE'를 1940년대에 결성하고 신학교, 언론사를 창립하였다. 이들이 보기에 자유주의 신학으초부터 교회를 구한 칼 바르트와 프랑스의 위대한 신학자 자크 엘뢸도 비기독교인 취급하는 근본주의자들은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었다. 그 순전함은 좋으나 그 순전함이 아군에게까지 휘두르는 칼이 되기 때문에 문제였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깊은 신학적 이해, 사회에 대한 통전적(균형적) 이해를 추구하였다. 또 전도 방식도 논리적, 체계적, 비폭력적 방식으로 개선시켰다.
신복음주의는 다시 보수적인 신학과 진보적인 신학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초창기 신복음주의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메이첸은 비교적 보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찰스 핫지와 벤저민 워필드의 보수적인 신학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하자 독립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고 미국정통장로교회(OPC)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보수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는 메이첸과 그 영향을 받은 교단, 신학교의 인물들이 술, 담배에 개방적이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는 매우 강경한 종말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결국 칼 매틴타이어는 신복음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후 훼이스 신학교를 세우고 매우 보수적인 신학과 폐쇄적인 기독교 교단, 종파간 교류를 지향하는 근본주의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는 현대문화 대부분을 반대하였고 이성적 신학 탐구, 질문하는 신앙에 대해 극도로 배척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후 칼 F. H. 헨리, 에드워드 카넬과 같은 진보적 복음주의(물론 다른 신학 전통들보다는 훨씬 보수적),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중도~온건 보수적 복음주의도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칼 헨리는 기독교인이 사회 불평등, 정치적 독재에 눈감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동시에 성경 중심 신앙 역시 강조하였다. 그의 책은 이후 두고 두고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
1913년 칼 F. H. 헨리는 독일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휘튼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북침례교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이후 1947년 새롭게 설립된 초교파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 초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러나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1956년부터 1969년까지 자유주의 진영의 <크리스천 센츄리>에 대항하기 위해 창간된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초대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복음주의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또한 <불편한 양심>이라는 신선한 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인들이 사회 문제와 실질적인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이것과 전도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본주의 기독교처럼 세상의 악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또 다른 신학 전통과의 대화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복음주의협회, 캐나다복음주의협회, 세계복음주의연맹, 로잔 언약 등 세계적인 기독교 조직과 모임에도 상당한 신학적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이외에도 <신, 계시, 권위>라는 6권으로 구성된 책이 있다.
풀러 신학교의 주요 인사였던 오켄가는 유명한 신학교인 미국의 고든 콘웰 대학 설립에도 참여했고, 세계 최대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 초대 총장으로 섬겼다. 오켄가는 1936년 메이첸의 보수적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판하였고 1942년에 세계복음주의연맹을 'NAE'로 본격적으로 개편하였다. 1948년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 사상인 근본주의와 대비되는 신복음주의 개념을 만들었다. 신복음주의는 전통적인 보수 신학과 장로교 현대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의 신학을 모두 수용하려 노욕한다.(다만 보수적인 신복음주의자들은 칼 바르트의 신학은 반대함)
이렇듯 신복음주의 개념을 고안한 오켄가는 33년 동안 회중교회 교단에 속한 파크스트릿 교회 목사로 섬겼으며 빌리 그레이엄의 친구로 오랜 시간 조언을 담당했다.
또 1956년 창간된 세계적인 기독교 언론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이단적 경향으로 비판받는 크리스천투데이와는 전혀 다른 곳)의 이사장을 맡았다. 1978년 성경무오설을 지지하는 시카고 선언에 서명하였다.
오켄가의 뒤를 이어 신복음주의 신학 연구를 발전시킨 사람이 에드워드 카넬이다.에드워드 카넬은 성경 무오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풀러신학교의 발전을 이끌었다. 2000년대에 풀러신학교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은 리처드 마우다. 그는 매우 온건한 침례교 학자로서 천주교를 같은 기독교로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했으며 알버트 몰러 박사와 구원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천주교를 존중하면서도 마리아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였다. 리처드 마우는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목사이자 총리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깊이있게 연구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상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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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진
사회적 이슈들
- 2013년에는 여러 다양한 인종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특히 불법체류자에게 시민권을 수여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행진을 하였다.
- "Black Lives matter"를 지지하는 성명을 공표하였다.
- 2015년에는 동성애 학생들이 클럽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 2019년 11월에는 한 학생이 퇴학 명령을 받자, 연방법 타이틀 IX 조항을 학교가 어겼다고 소송을 하였다. 그 조항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하는 대학은 연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조항이다. 이에 대해 학교 측은 법정에서 맞대응하기로 하였다.[4]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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