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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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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스크(벨라루스어: Пінск; 러시아어: Пинск, ru; 폴란드어: Pińsk; 우크라이나어: Пінськ; 이디시어: פינסק)는 벨라루스 브레스트주에 있는 도시이다. 행정적으로는 핀스크 라욘과 분리되어 있지만, 핀스크 라욘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한다.[1] 이 도시는 폴레시아의 역사적 지역에 위치하며, 피나강과 프리피야티강의 합류 지점에 있다. 이 지역은 프리피야티 소택으로 알려져 있으며, 민스크의 남서쪽에 있다. 2025년 기준 인구는 124,008명이다.[1]
역사적인 도시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2층 건물들로 복원된 시내 중심가를 가지고 있다. 이 중심가는 여름 테마파크와 축구 경기장이 있어 모든 연령대의 젊은이들에게 활기찬 장소가 되었으며, 이곳에는 도시의 축구 클럽인 FC 볼나 핀스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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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연대기
- 1097년 – 핀스크 최초 언급
- 1241년 – 투라우에서 동방 정교회 교구 이전
- 1316년 – 이 날짜 이후 핀스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
- 1396년 – 로마 가톨릭교회 교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설
- 1492년 – 핀스크가 알렉산데르 왕이 처음 소유한 왕실 도시가 됨
- 1569년 – 핀스크가 포비아트의 중심지가 됨
- 1581년 – 스테판 바토리 왕이 핀스크에 도시권 부여
- 1642–1646년 - 성 안드레이 보볼라가 핀스크와 그 주변의 예수회 수도원에 머물며 복음 전도 활동을 수행
- 1648년 – 도시의 반란과 막심 흐와트키 대령 지휘 아래 카자크 군대 진입. 정교회 신자가 아닌 시민들의 학살. 헤트만 흐레호리 미르스키 지휘 아래 약 1200–1300명의 야누슈 라지비우(1612–1655) 군대가 도시를 공격하여 도시를 점령. 도시는 완전히 불타고 주민의 약 1/3 – 1/2이 살해됨 (추정치로 흐멜니츠키 봉기 전 핀스크에는 약 10,000명의 주민이 있었음)
- 1655년 – 러시아인과 카자크가 도시를 공격하고 많은 주민을 살해
- 1657년 – 5월 중순 즈다노비치 휘하 카자크(약 2,000명)가 도시를 파괴하고 시몬 마폰 신부와 성 안드레이 보볼라를 포함한 많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살해
- 1660년 – 카자크가 핀스크를 공격하여 예수회 대학과 교회를 약탈하고 에우스타치 필린스키 신부 등을 살해
- 1662년 – 예수회 핀스크 복귀, 1년 후 수도원 화재
- 1666년 – 도미니코회 수도원 설립
- 1690년 – 얀 카롤 돌스키에 의해 카롤린 정착지 설립
- 1695년 – 미하우 세르바치 비시니오비에츠키에 의해 카롤리나에 교회와 성 건설
- 1706년 – 5월 5일부터 6월 3일까지. 칼 12세 스웨덴 왕에 의한 핀스크 점령. 미하우 세르바치 비시니오비에츠키 성 폭파
- 1707년 – 할라스트 장군과 호워비나 장군 군대에 의한 핀스크 점령
- 1709–1710년 및 1716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대규모 전염병
- 1717년 – 베르나르도 수녀회 수도원 건설
- 1734년 – 가르멜회 수도원 건설
- 1756년 – 마리아비테회 수도원 건설
- 1767년 – 오긴스키 운하 건설
- 1775년 – 왕실 운하 건설
- 1793년 – 제2차 폴란드 분할. 핀스크는 이제 러시아 제국에 속함
- 1795년 – 핀스크 가톨릭 교구 설립 (이전 핀스크는 루츠크 교구에 속했음)
- 1799년 – 카롤리나가 핀스크에 편입
- 1796년 – 유니에이트 핀스크 교구 청산
- 1799년 – 핀스크 가톨릭 교구 청산 (민스크로 이전됨)
- 1812년 – 7월, 핀스크는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됨
- 1850년 – 양초 및 비누 공장 설립
- 1882년 – 자빈카에서 철도 노선 연결 및 성냥 공장 개설
- 1885년 – 레슈체에 강 조선소 건설
- 1907–1909년: 민스크에 폴란드 교육 협회의 지방 지부가 활동하며 폴란드 문학과 어휘에 대한 강연을 조직했는데, 러시아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폴란드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 1909년 – 지방 선거에서 벨라루스인(정교회) 22명, 폴란드인(가톨릭) 7명, 유대인 2명, 기타 민족 대표 1명이 시의회에 선출됨
- 1915년 – 러시아 당국이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도시를 포기
제1차 세계 대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핀스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5년 9월 15일에 독일 제국에 점령되었다. 독일 패전 후, 핀스크는 수명이 짧았던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간의 분쟁 대상이 되었다. 핀스크는 1919년 1월 25일 1918–19년 소련 서부 공세 중 진격하는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1919년 3월 5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폴란드 군대에 의해 탈환되었으나, 1920년 7월 23일 붉은 군대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고, 1920년 9월 26일 폴란드에 의해 최종적으로 탈환되었다. 피스크는 1921년 3월에 체결된 리가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끝나면서 재건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2]
다른 동유럽의 많은 도시들처럼, 핀스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상당한 유대인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1897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체 28,400명의 주민 중 유대인이 약 74% (21,100명)를 차지하여 차르 통치 하의 가장 유대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3]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중, 핀스크의 유대인 민간인 35명이 1919년 4월 러시아 볼셰비키와 협력했다는 혐의로 폴란드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핀스크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은 베르사유 회의에서 주목할 만한 외교적 위기를 초래했다.[4][5]
전간기
피스크는 폴레시에주의 초기 수도였으나, 1921년 9월 7일 도시 전역에 걸친 화재 이후 브제시치나드부기에(현재 브레스트 (벨라루스))로 이전되었다. 전간기 폴란드에서 도시 인구는 1921년 23,497명에서 1931년 33,50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피스크는 번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상당한 이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70%가 유대인이었다.[6][7]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핀스크와 주변 지역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1940년부터 핀스크 오블라스트의 주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은 1941년 7월 4일부터 1944년 7월 14일까지 핀스크를 점령했으며, 우크라이네 국가판무관부의 일부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1942년 10월 말 독일 질서경찰과 벨로루시 보조 경찰에 의한 핀스크 게토 청산 과정에서 학살되었고,[4] 하루 만에 10,000명이 살해되었다. 1945년, 폴란드의 전후 국경 조정 이후 핀스크는 다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와 독립
1954년에는 브레스트 주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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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
도심의 세 가지 주요 명소는 강변을 따라 줄지어 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의 성모 승천 대성당 (1712–1730년), 1817년의 종루를 포함하며, 예수회 학원 (1635–1648년)은 매너리즘 양식의 대규모 복합 단지로, 그 대성당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마테우시 부트리모비치(핀스크와 폴레시아의 중요한 정치 및 경제 인물)를 위해 지어진 부트리모비치 궁전 (1784–1790년)이 있다. 성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 (1770–1782년)와 성 베르나르도 수도원의 성 바바라 대성당 (1786–1787년)은 핀스크의 일부가 된 이전 카롤린 교외 지역의 역사적인 중심지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현대 건물은 검은 돔 형태의 성 테오도르 정교회 대성당이다.
- 구 시장 광장
- 성 스타니스와프 대성당과 성 도미니코 교회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름 대성당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름 대성당
-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 예수회 학원
- 성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
- 성 바바라 대성당
- 성 테오도르 대성당성 테오도르 대성당
- 구 시나고그
- 부트리모비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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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주목할 만한 인물
- 핀스크의 아론 (1841년 사망), 랍비
- 마테우스 부트리모비치 (1745–1814), 폴란드-리투아니아 정치가, 폴레시에 개혁가
- 블라디미르 추브 (1948년 출생), 러시아 로스토프주 주지사
- 빈첸트 두닌-마르친키에비치 (1808–1884), 벨라루스 작가, 시인, 극작가, 사회운동가, 희곡 핀스카야 슐랴흐타의 저자
- 바루흐 엡슈타인 (1860–1941), 회계사, 랍비, 다작의 유대인 학자, 토라 테미마 토라 주해서로 가장 잘 알려짐
- 윌리엄 모세스 펠드만 (1880–1939), 핀스크 출생의 아동 생리학자
- 세묜 푸르만 (1920–1978), 체스 그랜드마스터이자 세계 챔피언 아나톨리 카르포프의 코치
- 요나 고골 (1602년 사망), 정교회 및 나중에 유니에이트 주교
- 올가 고보르초바 (1988년 출생), 벨라루스 테니스 선수
- 하임 그바티 (1901–1990), 이스라엘 농업부 장관
- 하임 카니옙스키 (1928–2022), 랍비
- 리샤르트 카푸치친스키 (1932–2007), 폴란드 작가이자 기자
- 다닐라 클리모비치 (2003년 출생), NHL 유망주, 현재 밴쿠버 커넉스와 계약 중이며, 아메리칸 하키 리그 애벗츠포드 커넉스의 현역 로스터에 있음
- 모셰 콜 (1911–1989), 이스라엘 정치인이자 이스라엘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한 명
- 이고르 콜브 (1977년 출생),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 안드제이 콘드라티우크 (1936–2016), 폴란드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촬영 감독
- 사이먼 쿠즈네츠 (1901–1985), 197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골다 메이어 (1898–1978), 이스라엘의 제4대 총리, 키예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2년을 핀스크에서 보냈다
- 샤브사이 모슈코프스키 (1895–1982), 저명한 의사, 연구 과학자, 말라리아학자
- 아담 나루셰비치 (1733–1796),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인, 역사가, 주교
- 나리문트 (1277–1348), 핀스크 공작
- 테오도르 오드라흐 (1912–1964), 우크라이나 및 폴레시아 소설가, 단편 소설가, 회고록 작가
- 나폴레옹 오르다 (1807–1883), 폴란드-리투아니아 음악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예술가
- 스와보미르 라비치 (1915–2004), 폴란드 육군 중위, 제2차 세계 대전 중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 걸어갔다고 주장
- 보나 스포르차 (1494–1557), 폴란드 왕비 및 리투아니아 대공비, 핀스크 공주
- 야우헨 샤토힌 (1947–2012), 벨라루스 화가이자 정치 운동가
- 이자 슐로스버그 (1950년 출생), 핀스크에서 태어나 44년간 핀스크에서 살았던 유대계 미국인 예술가
- 아이작 쇼엔버그 경 (1880–1963), 핀스크에서 태어난 전기 기술자, BBC에서 사용된 최초의 고화질 텔레비전 시스템의 주요 발명가
- 헬레나 스키르문트 (1827–1874), 폴레시아 화가이자 조각가
- 라만 스키르문트 (1868–1939), 벨라루스 및 폴레시아 정치가, 귀족, 지주
- 카지미에시 시비온테크 (1914–2011),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 민스크-모길료프 대주교 및 핀스크 교구장 서리
- 하임 바이츠만 (1874–1952),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핀스크 근처 모탈에서 태어나 핀스크에서 교육을 받았다
- 타티아나 울러스턴 (1986년 출생), 프로 스누커 심판, 핀스크 출생
- 레오 차이틀린 (1884–1930), 작곡가, 핀스크에서 태어나 오데사에서 공부한 후 미국으로 이주
- 이반 졸톱스키 (1867–1959), 소련 건축가이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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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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