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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노 고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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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노 고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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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노 고쇼(일본어: 花の御所 (はなのごしょ))는 일본 교토부 교토시 가미쿄구에 있었던 아시카가 쇼군케(足利将軍家)의 저택에 대한 통칭이다(북위 35° 1′ 50.2″ 동경 135° 45′ 31″). 그 부지는 동쪽을 가라스마루 도오리(烏丸通), 남쪽을 이마데가와 도오리(今出川通), 서쪽을 무로마치 도오리(室町通), 북쪽을 우에타치메 도오리(上立売通) 이렇게 네 개의 큰 도로가 에워싼 동서(東西) 1(町) ・ 남북(南北) 2정을 점유한[2] 규모였다. 교토고쇼(京都御所, 북위 35° 1′ 26.8″ 동경 135° 45′ 43.7″)가 있는 교토코엔(京都御苑)의 북서쪽 가라스마루·이마데가와 교차점을 끼고 비스듬하게 맞은편 한 모퉁이에 위치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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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杉本陶 판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에 그려진 '하나노 고쇼'. 그림 오른편이 북쪽으로 되어 있고, 그림 아래쪽으로 난 길이 가라스마루 도오리(烏丸通)로 여기에 면한 동쪽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1]
(일본어 교토 아스니京都アスニー 수록)
간략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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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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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쇼군 무로마치 저택 터에 세워진 비(足利将軍室町第址碑)

무로마치 가(室町家)의 가테이(花亭)와 이마테가와 가(今出川家)의 기쿠테이(菊亭)을 아울러서 한 부지로 삼았기 때문에 상당히 광대한 부지를 점유한 저택이었다.

현재의 일본 도시샤 대학 이마데가와 교지(同志社大学今出川校地)의 가라스마루 도오리(烏丸通)를 끼고 맞은편에 있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 간바이칸(寒梅館) 남쪽에 위치해 있다. 저택의 현존하는 흔적으로 저택 안에 세워졌던 오카마쓰도노(岡松殿)에서 시작된 사찰 다이세이지(大聖寺)가 현존하고 있다.

무로마치 도오리(室町通)에 면하여 정문이 세워져 있었던 데에서 무로마치도노(室町殿), 무로마치테이(室町第)라고도 불렸다. 이 쇼군의 거소를 따서 아시카가 쇼군 및 그 집안을 '무로마치도노'(무로마치 가, 室町家)라고 부른 때도 있었다.

또한 예로부터 쇼군의 거소를 '바쿠후'(幕府)라고 불렀던 데에서 따서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라 하였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부터 무가 정권(武家政権)의 이름으로써 '바쿠후'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면서 쇼군 아시카가 집안의 정권을 '무로마치 바쿠후'라고 부른 것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기타노고지(北小路) 무로마치(室町)에 있었던 데에서 기타노고지테이(北小路亭)라고도 불렸다. 덧붙여 기타노코지란 현대의 이마데가와 도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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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일쌍(六曲一双)[† 1]으로 가노 에이토쿠(狩野永徳)가 그린, 일본의 국보 《낙중낙외도 병풍》(洛中洛外図屏風)・좌척(左隻). 일본 요네자와 시 우에스기 박물관(米沢市上杉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하나노 고쇼는 가운데 왼쪽 밑에 그려져 있다. 오른쪽이 북쪽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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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는 현재의 교토코엔(京都御苑)의 북쪽 절반 지역에 교토의 구게(公家)들이 모여 사는 구게마치(公家町)가 있었다.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여러 구니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구게들이 하나둘 교토로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기존 부지만으로는 면적이 너무 좁았고, 남부나 가라스마루코지(烏丸小路) 동쪽, 기타노코지(北小路, 이마테가와 도오리) 북쪽으로도 구게마치가 확장되어갔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하나노 고쇼가 있던 부지에 구게 우라쓰지 가(裏辻家)와 니시고리 가(錦織家)가 설립되었다. 다만 큰길인 이마테가와 및 무로마치 도오리에 면해서는 장사를 하는 길이 좁은 조닌(町人)들의 마치야(町屋)가 생기게 되었다.

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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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다이세이지(2013년 촬영).

거듭되는 전란으로 몇 번이나 소실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였기에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저택 안에 지어졌던 오카마쓰도노(岡松殿)에서 시작된 아마몬제키 사원(尼門跡寺院)[† 2]다이세이지(大聖寺)가 거의 당시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원래는 오카마쓰 정(岡松町)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에는 인접한 고쇼하치만 정(御所八幡町)에 속해 있다.

다이세이지는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자신의 정실 히노 나리코(日野業子)의 고모인 히노 센시(日野宣子)가 조지(貞治) 7년(1368년)에 고곤 법황(光厳法皇)의 법사(法事)가 덴류지(天龍寺)에서 거행되었을 때 슌오쿠 묘하(春屋妙葩)를 도사(導師)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법호를 무소 데이엔 젠니(無相定円禅尼)[† 3]라 하였는데, 쇼군 요시미쓰는 출가한 무소 데이엔에게 하나노 고쇼 안에 있던 오카마쓰도노를 내어 주어 살게 했고, 무소 데이엔은 오카마쓰 1품(岡松一品)이라고도 칭하였다.

히노 센시는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의 덴시(典侍)로 북조의 궁정에서 큰 영향을 지니고 조카사위인 쇼군 요시미쓰나 고코곤 천황의 덴시였던 뇨인(女院) 히로하시 쥬시(広橋仲子)[4]와 그 소생으로써 즉위한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과 그 후궁 산죠 다카코(三条厳子)[5]와도 연담을 가지고 있었던 북조 궁정 내부의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4] 히노 센시는 후궁을 주관하면서 일족인 히노 씨의 여성들을 여럿 입궐시켜 고엔유 천황의 후궁으로 삼게 하였으며, 고엔유 천황이 모토히토 친왕(幹仁親王)에게 양위하는 문제를 놓고 요시미쓰와 상담할 때에도 히노 센시가 중간에서 요시미쓰에게 천황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7][† 5]

다이세이지는 이후 역대로 24명의 내친왕(内親王)이 그 주지를 맡으면서 일본 천황가와도 연고가 있는 사찰로써 아마몬제키 사원(尼門跡寺院)이 되었다. 통상적으로 다이에이지는 비공개로써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며 시절에 따라 특별 공개된다. 최근에 공개된 것은 2013년2020년 이른바 '교토 겨울 여행'(京の冬の旅) 주간을 계기로 한 특별 공개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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