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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기독교)
기독교에서 예수가 제시한 자신이 통치하는 영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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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Kingdom of God in Christianity)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개념이다.[1]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이 사상은 구약성경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독교적인 특징으로 하나님의 통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2] 구약은 모든 사람들의 심판자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며, 모든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개념은 기독교 가르침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3] 신약성경의 많은 본문들로 작성된 니케아 신경은 심판의 임무가 예수에게 부여된 것으로 보여준다.[4]

하나님 나라
요약
관점
이승구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닌 임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하시면서 하신 최초의 선포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나 주권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통치가 아닌, 아주 독특한 의미의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가까웠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였다”라고 한다. 이 교수는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구약 백성들 다수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지도 않았다. 거듭되는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열국 중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을 또한 약속해주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가 임하여 오기를 기다려 왔다. 그 하나님의 특별하신 통치하심에 대해 요한은 하나님 편에서는 오랜 침묵 끝에 다시 선포했다. 그가 헤롯에 의해 잡혀 투옥됐을 때,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을 피하여 갈릴리로 오셔서 다시 같은 선언을 시작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로마가 식민통치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 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다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시면서도 때때로 하나님이라고 시사(示唆)하시는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가 선언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의 기존 사고방식에 일치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외적으로 눈에 보이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나이까?’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대답하셨다.
이 교수는 “언젠가는 그 나라가 권능으로 눈에 보이게 임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그 누구라도 그 나라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권능으로 임하시기 전에도,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대로 그 나라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여 온 것이다. 바로 지금 자신들과 말씀을 나누시는 예수님이 있는 그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말씀의 통치라는 방식으로 이미 유대인들 가운데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영적으로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나라가 물리적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들을 귀 있고, 볼 수 있는 영적인 시력을 회복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선언’을 듣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예수를 열심히 믿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 역시 대학교 1학년 때까지도 그러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어떤 곳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목회자들인 우리가 이를 확신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는 성도들도 이를 확신해야 한다. 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극치에 이를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이미 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나라가 물리적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극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존재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가? 이 교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한 종말론적인 공동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개인과 공동체는 항상 전투하며 싸우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전투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관계성, 의식과 삶,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7:14)’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의를 지향하고 평강을 지향하는 삶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고 이 세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 된 우리의 역할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있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다. 천국이 여기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해서 영원한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사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천국은 이미 왔다. 이 세상에서 바로 천국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5]
그는 참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개념에 충실한 신학이라고 한다.[6]
첫째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중심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빛나는 나라라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님 나라 이해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여기서 드러납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들이 노력해서 세울 수 있는 나라로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은 성경적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러하였고, 초림에서도 그러하였으며, 그 나라를 극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루어질 재림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형성되는 나라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힘써 그 나라 백성 역할을 하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수 없고, 종국적으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 진정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일인 구원이 오직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개혁파 신학의 주장이 성경적이듯이,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도 오직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그 나라 백성 역할을 하도록 강조하지만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열심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론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설립과 진행과 극치에 이르게 하심에서도 하나님 홀로 역사하심(monergism, 神獨力主義)을 우리들은 강조해야 합니다. 구원에서나 더 넓은 개념인 하나님 나라에서나 신인협력주의(synergism)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지는 나라입니다(Soli Deo Gloria). 하나님도 영광스러워지고 덩달아서 우리도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번영의 신학은 성경적 하나님 나라 신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십자가라도 지고, 모든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고난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 신학과 부합합니다. 이 두 가지 점 모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 중심의(theo-centric) 나라이지,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나라가 아닙니다. 역사와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과연 어떤 하나님 나라 사상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 통치의 역사 안에서의 실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실현 개념을 가져야 하나님 나라를 성경적으로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막 1:15: 마 4:17)고 선언하실 때도 바로 이런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 통치의 실현을 염두에 두면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저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역사 속에 실현되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참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다라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기대와 연관하여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대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더 분명히 확언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다는 의미로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임하여 온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도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사역을 행하시는 그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이 말씀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끝까지 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에 보기에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기에 이 말씀을 믿기 어렵지만 성령님의 은혜로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또한 그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때가 장차 있다(막 9:1)는 가르침도 받아들입니다. 그 때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때라고 합니다(막 13:26).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잘 배우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측면이 있고, 그러나 올 것이 다 와서 더 이상 올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나라가 권능으로 올 때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신약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 때에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왔으나, 지금은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눅 17:20)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하나님 나라가 영적으로 임하여 왔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의 영적 실체(s spiritual reality)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하셨으나 타락한 이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 나라
이 세상 (하나님 나라)이 세상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현상태의 정확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이 세상에는 그 안으로 뚫고 들어 온, 보이지 아니는 하나님 나라에 의해서만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하나님 나라가 극치(極致, consummation)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금 이 땅에 “영적으로” “이미 와 있는” 그 하나님 나라가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옛 사람들은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영광의 왕국”은 지금 현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온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과 그 은혜의 왕국이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시며 그 모든 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주셔서 통제하도록 하신 온 세상에 미치는 보편적인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 모든 통일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국에는 이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 즉 “영광의 왕국”만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이사야서 65, 66장과 요한계시록 21, 22장과 베드로후서 3;13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영광의 왕국”=“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의 재림 후에 있을 “영원 상태”를 이렇게 지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극치에 이름이 속히 오기를 바라면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지금도 기도합니다.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까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늘”(heaven)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 6:11)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를 때까지 “하늘”에서도 기다리며 쉬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행 28:23, 31). 예수님과 바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다를 수 없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와 있음을 명확히 하면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라고 선언합니다.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미 이 땅 가운데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어 하나님 나라에로 옮겨지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곳에 와 있어야 일어 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나라가 영적으로 이 땅 가운데 현존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을 병행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골 1:14)이 곧 하나님 나라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서 예수님을 참으로 믿은 우리들은 (1) 이미 거듭나고 죄사함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 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2) 그리고 그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 나라 백성 역할을 해야 합니다. 즉,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가야 합니다. (3) 그러면서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사모하며, 그 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로,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죽어도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골 2:23).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죽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인지의 차이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쏘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죽음조차도 조롱할 수 있습니다(고전 15:55). 오히려 죽음에서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성화되니, 우리들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빌 1:21).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죽으면 그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 우리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빌 1:23). 우리 주님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그 때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참 성도들이 죽은 후에 있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는 성경 전체가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에 있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heaven)에 계심을 명확히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옵소서”(왕상 8:45//대하 6:35)라고 합니다. 히스기야 때에 오랫만에 유월절 절기를 지킨 후에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대하 30:27. 참조 애 3:50; 시 33:13)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하나님)(시 2:4; 애 3:41; 단 2:18; 시 115:3), “하늘에 계시는 주”(시 123:1), “하늘의 하나님”(시 136:26; 스 7:23) 등으로 언급합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마 5:48; 6:9; 18:10), 또 “하늘 아버지”(마 6:14, 32; 15:13; 18:35; 눅 11:13)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heaven)에 계시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 흰옷을 입고 두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주의한 사도들은 후에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고 같이 선언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가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요 3:13; 엡 4:10). 이렇게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에 계심을 성경은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위에서 그 곳을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관념을 따라 “셋째 하늘”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고후 12:2). 그곳을 “낙원”(paradise)이라고도 했습니다(고후 12:4). 우리 주님께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중생하여 예수님을 믿어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서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에 있게 됩니다. 이곳을 중국 분들과 옛 우리 조상들이 천당(天堂)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저 “하늘”(heaven)의 번역어를 이렇게 쓴 것입니다. 이제까지를 정리하면 다음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낙원(paradise)=천당(天堂)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늘에서 안식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렇게 하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면, 즉 영광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극치에 이런 천국에 우리들을 넉넉히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마 7:21; 행 14:22; 딤후 4:18). 그러나 믿는다고 말만 하고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6:9, 10).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음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나감으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음을 증언하고, 죽은 후에 하나님계서 계신 그 “하늘”(heaven)에 그 영혼이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극치”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여 그 “영광의 왕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이것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한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상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이런 성경적 용어 사용에 일치하게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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