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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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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가(아랍어: الهاشميون 알-하시미윤[*])는 1921년부터 요르단을 통치해 온 왕가이며, 헤자즈 (1916–1925), 시리아 (1920), 이라크 (1921–1958) 왕국의 왕가였다. 이 가문은 10세기부터 메카를 지속적으로 통치해 왔으며, 자주 외부 세력의 봉신 역할을 했고, 제1차 세계 대전대영 제국과의 동맹 이후 헤자즈,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의 왕위를 차지했다.

간략 정보 하심가 الهاشميون, 국가 ...

이 가문은 하사니드 메카의 샤리프의 한 분파인 다우 아운에 속하며, 하심가라고도 불린다.[2] 그들의 이름의 조상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심 이븐 압드 마나프로 여겨진다. 다른 주장되는 조상은 시아파 이슬람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왕위 찬탈된 계승자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이다.[3] 하심 왕가의 직계 조상인 카타다 이븐 이드리스[4]를 포함한 메카의 하사니드 샤리프들은 맘루크 시대 후기 또는 오스만 제국 초기까지 자이드파 시아파였으나, 이후 샤피이 학파수니파가 되었다.[5]

현 왕조는 1908년 오스만 술탄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메카의 샤리프이자 에미르로 임명된 후세인 빈 알리에 의해 건국되었고, 1916년에는 대영 제국과 비밀 협정을 맺은 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반란을 일으켜 아랍 국가들의 왕으로 선포되었지만(헤자즈의 왕으로만 인정됨). 그의 아들들인 압둘라파이살은 1921년에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계승했고, 그의 첫째 아들 알리는 1924년에 헤자즈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러한 합의는 "샤리프 해결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압둘라는 1951년에 암살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다. 왕조의 다른 두 분파는 살아남지 못했다. 알리는 영국이 1924-1925년에 후세인에 대한 지원을 철회한 후 이븐 사우드에 의해 축출되었고, 파이살의 손자 파이살 2세1958년 이라크 쿠데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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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메카의 통치자

역사가 이븐 할둔과 이븐 하즘에 따르면, 968c.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알-하사니메디나에서 와서 파티마 칼리파 알-무이즈의 이름으로 메카를 정복했는데, 알-무이즈는 이전에 이크시드 왕조로부터 이집트를 정복했다.[6][7] 자파르는 현대 왕조와는 다른 분파이지만, 더 넓은 바누 하심 부족 출신이었다. 바누 하심은 자신들의 조상을 기원전 497년경 사망한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심 이븐 압드 마나프로 추적한다고 주장하지만, 오늘날의 정의는 주로 파티마 빈트 아사드와 그녀의 아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을 지칭하며,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시아 이슬람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왕위 찬탈된 계승자이다.[8]

메카의 통제권은 그 일족에게 남아 있었다. 오스만 튀르크족이 이집트를 장악한 1517년, 샤리프 바라카트는 주권의 변화를 빠르게 인정하고 그의 아들 아부 누마이 2세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카이로로 보내어 성지의 열쇠와 다른 선물들을 바쳤다. 오스만 술탄은 바라카트와 아부 누마이를 헤자즈의 공동 통치자로 확정했다.[9][10][11]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랍 반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하심가의 다우-'아운 부족의 후세인 빈 알리오스만 제국 술탄을 대신하여 헤자즈를 통치했다. 한동안 오스만 포르테는 특정 후보군 중에서 메카의 에미르를 임명하는 관례를 따랐다. 1908년, 후세인 빈 알리는 메카 샤리프국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스탄불을 장악한 청년 튀르크당과 점점 더 갈등을 겪었고, 자신의 가족을 세습 에미르로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후세인 빈 알리의 혈통과 메카 샤리프라는 운명적인 위치는 독립된 아랍 왕국과 칼리프국에 대한 야망을 부추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오스만 통치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후세인을 직접적인 감독 하에 두기 위해 술탄의 손님으로 이스탄불에 "초대"했다. 후세인은 네 아들인 알리, 압둘라, 파이살, 제이드를 데리고 갔다. 그는 청년 튀르크 혁명 이후에야 헤자즈로 돌아갈 수 있었고 공식적으로 샤리프로 임명되었다.

후세인의 네 아들 중 압둘라는 가장 정치적 야망이 있었고 아랍 반란의 기획자이자 추진력이 되었다. 압둘라는 헤자즈와 이스탄불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오스만 의회에서 메카의 대의원이었다. 이 기간 동안 압둘라는 아랍 민족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헤자즈에서의 자치 통치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을 제국 전체의 완전한 아랍 해방과 연결시켰다.[12] 1914년 그는 카이로에서 영국 고등판무관 키치너 경을 만나 터키인들에 대한 아랍 봉기를 영국이 지원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협력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양측 모두 약속은 하지 않았다. 압둘라가 메카로 돌아온 직후 그는 아버지의 외무장관, 정치 고문, 그리고 아랍 반란의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후세인의 셋째 아들 파이살은 아랍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반란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전체 지휘권은 그의 아버지에게 주어졌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봉기 구상은 압둘라가 처음으로 생각해낸 것이다.[13] 점진적이고 끈질긴 설득 끝에 압둘라는 보수적인 메카의 샤리프인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오스만 제국 내 아라비아 일부의 자치 통치라는 생각에서 제국 전체의 아랍 지방에 대한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게 했다. 후세인은 1914년 초에 오스만 틀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제국으로부터 벗어날 필요성을 인식했다. 아랍 반란이 성공하려면 다른 강대국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후세인은 아랍 통일을 자신의 왕권과 동일시했다. 그는 아라비아반도 전체, 시리아 지역, 그리고 이라크를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의 통치 아래 두기를 열망했다. 1년간의 fruitless 협상 끝에 헨리 맥마흔 경은 후세인이 열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한된 지역에 대한 아랍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영국 정부의 동의를 전달했다. 본질적으로 영국-하심가 음모인 아랍 반란은 1916년 6월에 발발했다. 영국은 반란에 자금을 지원하고 무기, 식량, 직접적인 포병 지원, 그리고 곧 유명해질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를 포함한 사막 전투 전문가를 제공했다. 하심가는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했고, 그들의 야심찬 계획은 무너졌다. 샤리프 깃발 아래에 합류한 시리아와 이라크 민족주의자는 소수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오스만 술탄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는 1916년 아랍 반란 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14]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연합군 노력에 하심가가 기여한 대가로 영국은 아랍 독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맥마흔-후세인 서한은 이 약속을 둘러싼 영토 경계를 모호하게 정의하여 양측 간의 길고 쓰라린 불일치를 초래했다.

전후: 샤리프 해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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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가 1918년 11월 전쟁 내각 동방 위원회에 제출한 지도에 설명된 원래의 샤리프 해결안[15]1921년 3월 카이로 회담에서 합의된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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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왕조의 가계도

전쟁 후, 영국은 다양한 전쟁 공약을 "[모든 얽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샤리프 해결안"을 고안했다.[16] 이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을 새로 건국된 중동 국가들의 왕으로 앉히는 것을 제안했다.[17]

지출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과 프랑스가 1920년 7월 시리아에서 파이살을 제거하고 1920년 11월 압둘라가 트란스요르단 (파이살의 시리아 남부 지역)으로 진입하는 등 영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요인들을 고려할 때, 최종적인 샤리피 솔루션은 다소 달랐는데, 이는 1921년 카이로 회담 이후 식민지부 장관 윈스턴 처칠에 의해 시행된 영국 정책의 비공식적인 명칭이었다.[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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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반 후세인의 아들들: 알리, 압둘라, 파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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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요르단의 창시자 압둘라 1세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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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의 그랜드 샤리프이자 헤자즈의 국왕이며 요르단, 이라크, 아라비아의 하심 왕조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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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의 그랜드 샤리프이자 헤자즈의 에미르 샤리프 아운

후세인 빈 알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오스만 세력이 붕괴된 후 1916년부터 1924년까지 독립적인 헤자즈를 통치했으며,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고 영국 외무영연방부의 묵시적 지지를 받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때때로 "샤리프인" 또는 "샤리프파"라고 불린다. 아라비아반도에서 후세인 빈 알리의 주요 경쟁자인 나지드 (고원 지대)의 왕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1925년에 헤자즈를 합병하고 자신의 아들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 지역은 나중에 사우디아라비아에 편입되었다.

트란스요르단에서 영국 정부는 1921년에 압둘라를 통치자로 하여 독립을 승인했다. 식민지 강대국들이 아랍 국가들에게 부여한 독립의 정도는 당시 계속되는 문제였으나, 트란스요르단의 경우 누린 독립은 제한적이었다. 영국 정부런던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통제권을 보유했다. 국내 문제에서 현지 통치자는 상당한 권력을 부여받았지만, 이러한 권한은 암만영국 상주관예루살렘의 영국 고등판무관의 감독 하에 하심가에 의해 독재적으로 행사되었다.[20] 압둘라는 1951년에 암살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하심가가 거의 40년간 통치하다가 파이살의 손자 파이살 2세1958년 이라크 쿠데타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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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 및 가계도

요약
관점

가계

출처:[21][22]

하심
(이름의 조상)
압둘 무탈리브
아부 탈리브압둘라
무함마드
(이슬람 예언자)
알리
(4대 칼리파)
파티마 알-자흐라
알-하산
(5대 칼리파)
알-하산 알-무타나
압둘라
무사 알-자운
압둘라
무사
무함마드
압둘라
알리
술레이만
알-후세인
이사
압둘 알-카림
무타인
이드리스
카타다
(메카의 샤리프)
알리
알-하산
(메카의 샤리프)
아부 누마이 1세
(메카의 샤리프)
루마이타
(메카의 샤리프)
'아즐란
(메카의 샤리프)
알-하산
(메카의 샤리프)
바라카트 1세
(메카의 샤리프)
무함마드
(메카의 샤리프)
바라카트 2세
(메카의 샤리프)
아부 누마이 2세
(메카의 샤리프)
알-하산
(메카의 샤리프)
압둘라
(메카의 샤리프)
알-후세인
압둘라
무신
아운, 라아이 알-하다라
압둘 무인
무함마드
(메카의 샤리프)
알리
군주 알-후세인
메카의 샤리프
1908년 11월 – 1924년 10월 3일
헤자즈 국왕
1916년 10월 – 1924년 10월 3일
군주 알리
헤자즈 국왕
1924년 10월 3일 – 1925년 12월 19일
(군주국 사우디 정복으로 패배)
군주 압둘라 1세
요르단 에미르이자 후일 국왕
1921년 4월 11일 – 1951년 7월 20일
군주 파이살 1세
시리아 국왕
1920년 3월 8일 – 1920년 7월 24일
이라크 국왕
1921년 8월 23일 – 1933년 9월 8일
제이드
(이라크 왕위 주장자)
압딜라흐
(이라크 섭정)
군주 탈랄
요르단 국왕
1951년 7월 20일 – 1952년 8월 11일
군주 가지
이라크 국왕
1933년 9월 8일 – 1939년 4월 4일
라아드
(이라크 왕위 주장자)
군주 알-후세인
요르단 국왕
1952년 8월 11일 – 1999년 2월 7일
군주 파이살 2세
이라크 국왕
1939년 4월 4일 – 1958년 7월 14일
(군주국 쿠데타로 전복)
제이드
군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1999년 2월 7일 – 현재
알-후세인
(요르단 왕세자)

본가

  • 국왕왕비 (군주와 그의 아내)
    • 왕세자라즈와 공주 (국왕의 장남과 며느리)
      • 이만 공주 (국왕의 손녀)
    • 이만 공주 (국왕의 장녀)
    • 살마 공주 (국왕의 차녀)
    • 하심 왕자 (국왕의 차남)

후세인 국왕의 후손

  • 누르 왕비 (후세인 국왕의 넷째 부인이자 미망인)
    • 함자바스마 공주 (국왕의 이복동생과 제수)
      • 하야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제인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누르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바디야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나피사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후세인 왕자 (국왕의 이복 조카)
      • 무함마드 왕자 (국왕의 이복 조카)
    • 하심 왕자와 파흐다 공주 (국왕의 이복동생과 제수)
      • 할라 알-누르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라이야 알-누르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파티마 알-알리아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알-후세인 하이다라 왕자 (국왕의 이복 조카)
      • 무함마드 알-하산 왕자 (국왕의 이복 조카)
    • 이만 공주 (국왕의 이복여동생)
    • 라이야 공주 (국왕의 이복여동생)
    • 하야 공주 (국왕의 이복여동생)
    • 알리 왕자림 공주 (국왕의 이복동생과 제수)
      • 잘릴라 공주 (국왕의 이복 조카딸)
      • 압둘라 왕자 (국왕의 이복 조카)
  • 무나 공주 (후세인 국왕의 둘째 부인; 국왕의 어머니)
    • 파이살 왕자와 제이나 공주 (국왕의 동생과 제수)
      • 아야 공주 (국왕의 조카딸)
      • 오마르 왕자 (국왕의 조카)
      • 사라 공주 (국왕의 조카딸)
      • 아이샤 공주 (국왕의 조카딸)
      • 압둘라 왕자 (국왕의 조카)
      • 무함마드 왕자 (국왕의 조카)
      • 라자아 공주 (국왕의 조카딸)
    • 알리아 공주 (국왕의 전 제수)
    • 아이샤 공주 (국왕의 여동생)
    • 제인 공주 (국왕의 여동생)
    • 알리아 공주 (국왕의 이복여동생)

탈랄 국왕의 후손

  • 타그리드 공주 (국왕의 고모)
    • 탈랄 왕자기다 공주 (국왕의 사촌과 사촌 부인)
      • 후세인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무함마드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라자아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가지 왕자미리엄 공주 (국왕의 사촌과 사촌 부인)
      • 타스님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압둘라 왕자 (국왕의 재종질)
      • 제나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살사빌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피리알 공주 (국왕의 전 고모)
  • 하산 왕자사르바트 공주 (국왕의 숙부와 숙모)
    • 라흐마 공주 (국왕의 사촌)
    • 수마야 공주 (국왕의 사촌)
    • 바디야 공주 (국왕의 사촌)
    • 라시드 왕자제이나 공주 (국왕의 사촌과 사촌 부인)
      • 하산 왕자 (국왕의 재종질)
      • 탈랄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바스마 공주 (국왕의 고모)

압둘라 1세 국왕의 후손

  • 알리 왕자와 리마 공주 (국왕의 사촌과 사촌 부인)
    • 무함마드 왕자와 시마 공주 (국왕의 재종제와 그의 아내)
      • 함자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라니아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카르마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하이다르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나아파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라즈와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바스마 파티마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아셈 왕자사나 공주 (국왕의 사촌과 사촌 부인)
    • 야스민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사라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누르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살하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네즐라 공주 (국왕의 재종질녀)
    • 나예프 왕자와 파라 공주 (국왕의 재종제와 그의 아내)
      • 나예프 왕자 (국왕의 재종질)
  • 나이페 공주 (국왕의 고모할머니)

이라크 하심가 (제이드 이븐 자이드 왕자의 후손)

이라크 하심가 라아드 이븐 자이드의 후손들은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요르단에서는 전하(His Royal Highness) 및 왕자(Prince)의 호칭을 사용한다. 후손으로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낸 요르단 외교관 제이드 빈 라아드미레드 빈 라아드 왕자가 있다.

비왕족

많은 다우 아운 부족 구성원들이 1920년대 초 압둘라 1세 에미르와 함께 트란스요르단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후손 중 일부는 왕실 수석 비서, 총리, 대사 등 요르단 국가에서 중요한 직책을 얻었다. 다우 아운 부족 구성원의 후손들은 샤리프라고 불리며, 자이드 이븐 샤케르를 제외하고는 왕자 칭호를 받지 못했다. 전직 총리이자 왕실 수석 비서인 샤리프 후세인 이븐 나세르[23], 샤리프 압델하미드 샤라프[24], 제인 알-샤라프 왕비 (탈랄 국왕의 아내이자 후세인 국왕의 어머니)와 그녀의 오빠 샤리프 나세르 빈 자밀 등이 그 예이다.[25]

요르단에서 왕자 칭호는 일반적으로 후세인 빈 알리, 메카의 샤리프의 네 아들 중 한 명의 부계 후손에게만 제한된다.

샤리프 알리 빈 알-후세인이라크 입헌군주제 정당의 지도자였으며 현재 "샤리프"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디나 압둘-하미드 왕비 또한 하심가 일원이었다. 그녀는 무함마드의 손자인 하산 이븐 알리부계 후손으로서 샤리파의 존칭을 사용할 자격이 있었다.

제이드 이븐 샤케르 왕자의 후손

전 요르단 총리이자 군 총사령관인 제이드 이븐 샤케르 왕자는 다우 아운 부족의 일원으로, 그의 아버지 샤케르 이븐 자이드는 그의 사촌 압둘라 1세와 함께 트란스요르단으로 이주했다. 그는 1996년에 세습되지 않는 "왕자"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자녀들, 즉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은 "샤리프"라고 불리며 왕자는 아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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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알린족

자알린족아랍인 혈통이며, 아바스 왕조의 귀족 이브라힘 자알에게서 기원하며, 그의 씨족은 본래 아라비아반도헤자즈 출신으로, 현지 누비아인과 결혼했다. 자알은 알-압바스의 후손으로, 그는 무함마드의 삼촌이었다. 자알린족은 그들의 혈통을 무함마드의 삼촌인 압바스로 추적한다.[27] 1888년 영국왕립인류학협회에 따르면, 자알린이라는 이름은 어떤 부족의 창시자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두다" 또는 "머무르다"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 자알(Ja'al)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 의미에서는 정착한 사람들을 뜻한다.[28] 다양한 연구자들은 자알린족이 아랍화누비아인이라고 주장했다.[a] 19세기 몇몇 여행자들은 그들 사이에서 누비아어가 여전히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32]

같이 보기

  • 예루살렘 성지의 하심가 수호권
  • 요르단 왕위 계승 순위

내용주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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