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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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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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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漢裝)’ 또는 ‘화복(華服)’이라고도 하며,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여러 왕조를 거치며 발전해 온 복식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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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한푸(漢服)’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 문헌에도 등장하며,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한복 제도(漢服制度)”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21세기 초반에는 전통문화 복원운동의 일환으로 ‘한푸 복원 운동’이 일어나, 고대 복식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유래

한푸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상(商)·주(周) 시대부터 의관 예제가 정비되었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유교적 덕목이 복식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청(淸) 왕조 시기에는 만주족의 변발과 복식이 강요되면서 한푸의 착용이 크게 줄었으나, 제사·혼례·연극 등에서는 여전히 명(明)대 계통의 복식이 사용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학계와 민간에서 한푸의 복원과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2000년대 이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운동은 전통문화의 계승과 미학적 복원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역사

요약
관점

하나라와 상나라를 거친 후 관복 제도가 점차 수립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서주 시대에 주례 제도가 형성되어 의관예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생겼고 관복 제도가 점차 예치(禮治)의 범위 속으로 들어가 예절 문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왕조에 따른 복식특징에 있어 몇 가지 차이가 존재하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있다.

상나라

상나라 때는 직기자수가 발달했는데, 당시에는 상의와 하의가 나뉘어져 있었다.[1] 당시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허리에 넓은 요대(腰帶)를 둘렀으며 옷깃, 소맷부리에 자수 장식을 했다.

주나라

주나라에 들어 봉건 제도가 확립되었고 의관제도도 점차 완비되었다. 당시에는 신분의 구별이 심했기 때문에 복식 중에서도 관복등급의 엄격한 구별이 있었다. 제왕과 귀족은 모두 장소와 신분에 따른 복식을 입어야 했다.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와 심의(深衣)가 등장했다. 심의는 위아래를 나누어 재단한 후 중간 부분을 이어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게 했다. 심의는 용도는 광범위하여 성별이나 신분에 상관 없이 모두 입을 수 있었으며 당시에 크게 유행했다.

진·한 시대

진나라 때 중국이 통일된 후 각종 제도가 새로 창립되었으며 그중에는 자연히 관복제도를 포함한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았는데 무제 때 서역과 문화교류가 강화되면서 복식의 색채가 더욱 다양해졌다. 한나라 때 성행한 복식은 온몸을 감싸는 포(袍) 위주였고 양식은 소매가 큰 것이 많다. 어깨부터 직통으로 발까지 내려가는 긴 장포(長袍)는 당시 가장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한나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의관과 복제도 화려해졌다. 한나라 때 귀족의 예복은 치마, 옷깃, 소매에 테두리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빈번한 전란으로 인구학적 이동이 잦았다. 동시에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섞여 거주하는 상태가 나타남에 따라 한족과 변방민족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끼쳤다. 크고 헐렁한 옷에 넓은 띠인 포의박대(褒衣博帶)는 이 시기에 유행하던 복식으로 느슨한 복장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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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시대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는 비단의 염색 및 직조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더불어 실크로드의 개통 및 교역으로 쿠처, 남조, 토번,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사자들이 각 지역의 문화를 가져왔고 이는 당나라 시기의 한푸가 다양한 문화적 특징을 수용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염색기술의 발달로 무늬가 들어가게 된다.

당나라 때 남자들의 가장 전형적인 복장은 원령(圓領 둥근 깃)에 포삼(袍衫)을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사모(紗帽)를 쓴 것이다. 원령은 한족이 아닌 선비족의 복식에서 유래한 호복의 일종으로 선비족 문화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던 수나라, 당나라의 관복 시스템으로서, 이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실이 한화(漢化)된 선비족 혈통들의 왕조였기 때문이다. 고대 복두란 사견(紗絹)으로 만든 사각형 두건을 말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좌우에 각(角)을 부착한 모양으로 당나라 때 널리 유행했다. 복식의 특징은 옷깃이 낮게 내려가고 소매가 크며 치마허리를 높이 묶었다. 주요한 양식은 위에는 짧은 저고리나 적삼을 입고 아래는 긴 치마를 입었으며 소매가 없거나 짧은 겉옷인 반비(半臂)를 입고 어깨에는 피백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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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송나라의 의관복식은 당나라의 전통복제를 답습하긴 했으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리학을 숭상해 전통의 보수적인 도덕관을 강조되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복식도 더 이상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고 간단하며 소박한 것이 위주가 되었다.

송나라 남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각종 장소에서 모두 박두(幞頭)를 썼다. 단, 이때의 박두는 비교적 모자와 비슷한 모양의 직각 관모(冠帽)였다. 복식은 둥근 깃을 위주로 다양한 색상의 포삼(袍衫)으로 등급을 구분했다. 송나라 귀족 여인의 예복은 소매가 큰 적삼인 대수삼(大袖衫)이었다. 송나라는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제사 등 중요한 장소에서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일반 평민 여인의 복식은 상의에 유(襦), 삼(衫), 오(襖), 대수(大袖), 반비(半臂), 조끼 등을 입어 양식이 다양했고 아래에는 치마를 입었다. 이중 배자는 당시에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유행했던 복식으로 외투의 일종이며 직령(直領 곧은 깃)과 대금(對襟 웃옷의 두 섭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서 단추를 채우는 맞깃),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것이 특징이다.

원나라

명나라

명나라에서는 한족 전통복식의 체계를 복원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남자는 포삼(袍衫)과 오사모(烏紗帽)를 착용했고, 관직의 등급에 따라 옷의 색과 문양이 구분되었다. 여성복은 오(襖), 삼(衫), 배자, 비갑(比甲), 치마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혼례나 제례에는 봉관하피(鳳冠霞帔)를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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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족 복식이 공식 복장으로 지정되었고, 한족에게도 변발과 복식 개정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제례·혼례 등에서 여전히 명대 복식을 유지하였다. 청대의 ‘치파오(旗袍)’는 만주족 여성 복식에서 유래하였으며, 20세기 초 한족 여성에 의해 개량되어 오늘날의 형태가 되었다.

현대의 한푸 복원

오늘날 한푸는 중국 본토,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여러 지역에서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복식 체험, 학술연구, 전통예절 복원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푸는 단순한 의복을 넘어 전통 미학과 문화 정체성을 상징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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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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