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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영국의 화가 (1863~1920)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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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영어: Herbert James Draper, 1863년 11월 26일~1920년 9월 22일)는 영국의 신고전주의 화가로, 빅토리아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20년에 걸쳐 활동했다.

간략 정보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Herbert James Draper, 신상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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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63년 런던코번트가든에서 태어난 그는 과일 상인이었던 존 제임스 드레이퍼와 그의 아내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째 아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1][2] 드레이퍼는 토트넘의 브루스 캐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3] 이후 왕립예술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3] 그는 1889년 왕립예술원 금메달과 해외유학생 자격을 얻어 1888년부터 1892년까지 로마파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1890년대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으며, 결국 런던에 정착했다. 1891년 그는 아이다(결혼 전 성은 윌리엄스)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이본이라는 딸이 있었다.[3] 그는 말년을 보낸 애비 로드의 자택에서 동맥경화로 56세에 사망했다.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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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로스를 위한 탄식》, 1898년, 테이트 브리튼

드레이퍼는 1894년부터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주로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1898년 작품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이후 프랜시스 레가트 챈트리 이사에 의해 테이트 갤러리 소장품으로 구입되었다. 그는 또한 런던 시티에 있는 드레이퍼스 홀의 천장 장식 작업도 맡았다.[4] 그의 드로잉 실력은 뛰어났으며 남성과 여성 누드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다.[5] 그의 여러 작품은 자부심 넘치고 때로는 포식적이기까지 한 여성의 성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새벽의 문》(1899), 《물의 님프》(1908), 《율리시스와 세이렌》(1909)[5], 《켈피》(1913)[5] 등이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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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랭클린경의 초상, 1912년경

후기로 갈수록 대중의 취향이 변화하며 신화적 장면이 인기를 잃자 그는 초상화에 더 집중했다.[6] 그는 여러 고위 관직자들의 초상화를 남기며 초상화 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드레이퍼는 1890년부터 왕립예술원 연례전에 참여했다. 그는 1898년, 1903년, 1905년, 1920년에 회원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선출되지는 못했다.[7] 말년에 그의 인기는 시들었으나 최근 미술 시장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2010년 왕립 콘월 박물관이 재정 확보를 위해 그의 《바다의 아가씨》와 어니스트 노먼드의 《속박》을 경매에 내놓자, 예술품 처분 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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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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