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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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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許任, ? ~ ?)은 조선 중기의 의관 겸 관료로 선조에서 인조 때까지 활동했다. 본관은 하양(河陽)이다.[1] 양양의 관노 출신 악공인 허억봉(許億鳳[2])[3]의 아들이며, 악사(樂師)인 허롱(許弄)의 조카이다. 허임의 어머니는 김귀영의 사비(私婢)였다.[4][5] 나중에 아버지는 우의정 부원군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봉해졌다.[6]
생애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세종 때 좌의정이었던 허조(許稠)의 9대손으로 그의 가계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다 모두 관노가 되었다.
허임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의원의 집에서 치료비 대신 궃은일을 하며 의술을 터득했다.
1593년 침의로 발탁되어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따라 종군의사로 활동하였다.[7]
1604년 9월에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6품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8] 허임은 뜸과 침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침을 잘 놓는 의사로 뽑혀 왕을 치료하였고,[9] 이 때문에 가자(加資)받았다.[10] 1609년(광해군 1년) 마전[11] 군수(麻田郡守)의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사헌부에서 허임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12] 광해군은 처음에는 이를 듣지 않았으나 신하들이 거듭 간하자 결국 군수의 직을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했다.[13]
1612년(광해군 4년)에 광해군이 해주(海州)에 있을 때 자신을 모신 공로로 3등 공신에 녹훈되었다.[14] 벼슬은 부평 부사·남양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1616년(광해군 8년)에는 영평[15] 현령(永平縣令)에 제수되었고,[16] 이듬해(1617년, 광해군 9년)에는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17] 이번에도 사간원이 허임의 신분이 낮음을 이유로 거듭 벼슬을 거둘 것을 청해 관직이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바뀌었다.[18]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이경석의 부탁으로 이경설(李景卨: 이경석의 둘째 형)을 직접 치료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유간(李惟侃: 이경석의 아버지)는 허임의 침술을 가리켜 '명불허득'이라고 찬탄했다.[19]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남양[20] 부사(南陽府使)의 자리에 올랐다.[21] 인조반정 직후에는 관직을 잃었지만,[22] 1628년(인조 6년)에는 상을 두 차례 받았다.[23] 1639년(인조 17년)에는 청한(靑汗)이 나는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다.[24] 1644년(인조 22년) 《침구경험방》을 간행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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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관련 작품
드라마
소설
- 《허임 천하제일침》 (황금가지 출판사, 저자: 성인규, 이상곤)
가족 관계
같이 보기
- 허임기념사업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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