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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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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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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후트(Herrnhut, de, 고지 소르브어: Ochranow, 체코어: Ochranov, 고지 루사티아어: Harrnhutt, Harrnutt)는 독일 동부 작센주 괴를리츠 구고지 루사티아에 위치한 약 6,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주로 모라비아 형제회(니콜라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 백작이 1722년에 설립) 공동체의 발상지이자 모라비아의 별(헤른후터 슈테르네)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간략 정보 헤른후트, 마을 헤른후트 의 괴를리츠에 위치 ...

2016년, 이 마을은 유럽 개신교회 공동체로부터 유럽 종교개혁 도시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고, 2024년에는 헤른후트가 크리스티안스펠트(덴마크), 베슬리헴 (펜실베이니아주)(미국), 그레이스힐(북아일랜드)과 함께 "모라비아 교회 정착지"(Siedungen der Herrnhuter Brüdergemeinde) 연속 유적지의 일부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2] 헤른후트는 지타우산맥의 구릉지 전면부에 있는 뢰바우지타우라는 큰 도시들 사이에 위치하며, 나이세강의 지류인 플리스니츠강의 가장 긴 상류인 페터스바흐강에 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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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 도시는 역사적인 고지 루사티아 지역에 위치하며, 분데스슈트라세 178 도로와 지타우-뢰바우 철도 노선에 있다. 헤른후트는 뢰바우에서 남동쪽으로 약 10 km (6.2 mi), 지타우에서 북서쪽으로 약 15 km (9.3 mi), 군청 소재지인 괴를리츠에서 남서쪽으로 약 25 km (16 mi) 떨어져 있다.

이 지자체는 다른 지자체 중에서도 오더비츠와 접해 있다.

하위 행정 구역

헤른후트는 또한 해당 지자체에서 가장 큰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2013년 1월 1일 베르텔스도르프가 편입된 이래로, 이 지자체에는 11개의 하위 행정 구역이 있다.

  • 헤른후트 (원래 도시)
  • 니니베
  • 루퍼스도르프
  • 슈반
  • 프리덴스탈
  • 슈트랄발데
  • 오이도르프
  • 그로스헤너스도르프
  • 호이슈오이네
  • 노이엔도르프 아우프 뎀 아이겐
  • 쇤브룬
  • 베르텔스도르프
  • 레너스도르프/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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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헤른후트 자체는 18세기 초에 형제 연합의 독일어권 구성원들, 즉 모라바 변경백국 출신의 종교적 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형제 연합은 개혁가 얀 후스가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당한 후에 생겨났다. 18세기에 그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이 보헤미아 왕관령에서 시행한 엄격한 반종교개혁 조치에 직면해야 했다. 1722년부터 난민들이 프라하 조약 (1635년) 이래로 작센 선제후들이 통치하던 고지 루사티아로 왔다. 모라비아 선교사인 그들의 지도자 크리스티안 다비트를 만난 후, 독일 귀족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 백작(1700–1760)은 그들을 자신의 넓은 베르텔스도르프 영지에 정착하도록 초대했다.

얼마 후, 다비트는 헤른후트가 될 곳에 첫 번째 집을 지었다. Herrn Hut은 주님의 세심한 보살핌 또는 주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친첸도르프 자신도 1725–1727년에 이곳에 새로운 거주지를 지었다. 헤른후트에서 공동체는 베를린 근처의 릭스도르프, 뷔딩겐 근처의 옛 마리엔보른 수도원, 헤른하크, 노르덴, 파블로비츠케(1771–1772)로 퍼져나갔다. 전 세계에 수많은 자매 교회들이 생겨났다. 최초의 조직적인 개신교 선교 운동은 1732년 헤른후트에서 시작되었는데, 두 명의 보헤미아 형제가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로 갔고, 그 다음 다른 이들도 그린란드로 갔다. 최초의 북미 선교 활동은 1735년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시작되었다. 1738년에는 남아프리카에 헤나덴달 선교 기지가 설립되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스펠트는 1771년에 뒤를 이었다.

헤른후트는 개신교의 역사와 더 넓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친첸도르프의 공동체는 존 웨슬리감리교회를 창설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전 세계 3억 명이 넘는 광범위한 교파 간 운동인 복음주의의 부흥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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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연도183418711890191019251939194619501964199020002010
인구89910921139136416641627202420251808175428424963

1777년 작센 주 의회에 따르면, 헤른후트에는 76채의 집이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인구가 1,000명을 넘어섰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2,000명 이상에 달했다. 1950년대 이후 인구 감소가 있었으나, 이는 인접 지자체의 편입으로 상쇄되었다.[3]

위치 지도

문장

헤른후트의 문장은 파란색과 흰색이며, 도시 위의 후트베르크 언덕 꼭대기에 있는 알탄(전망대)의 탑을 보여준다. 후트베르크 언덕("감시의 언덕")이라는 이름은 1722년 친첸도르프 영지에 이 망명자들이 세운 모라비아 정착지의 이름을 암시했다. Herrn Hut은 "주님의 세심한 보살핌"을 의미한다.

문화

헤른후트에는 교회와 두 개의 박물관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지역 역사 박물관이다. 이곳은 독일어로 브뤼더-운리테트 또는 브뤼더게마이네라고 불리는 전 세계 모라비아 형제회인 유니타스 프라트룸의 중심지이다. 많은 유럽 언어는 모라비아 교회 운동을 헤른후트의 이름을 따서 직접 불렀는데, 예를 들어 에스토니아어로는 hernhuutlus, 핀란드어로는 herrnhutilaisuus, 라트비아어로는 hernhūtieši, 그리고 노르웨이어스웨덴어로는 herrnhutismen이다.

폐쇄된 지타우-뢰바우 철도 노선의 옛 헤른후트 기차역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경제

경제는 교회 행정, 교육, 관광 및 제조를 기반으로 하며, 150년 이상 생산되어 크리스마스 시즌에 종종 창문과 현관에 걸리는 25개의 뾰족한 별을 포함한다. 이것은 모라비아의 별 또는 모라비아 강림절의 별 (Herrnhuter Adventsstern 또는 간단히 Herrnhuter Stern)이라고 불린다. 헤른후트에서 모라비아의 별 장식은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갤러리

저명한 인물

Thumb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예슈케
  • 크리스티안 레나투스 폰 친첸도르프(1727–1752), 교회 작가
  •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예슈케(1817–1883), 선교사, 언어학자, 동양학자
  • 아돌프 하인리히 리어(1826–1882), 풍경화가
  • 휴고 테오도르 크리스토프(1831–1894), 곤충학자
  • 허버트 피셔(1914–2006), 동독 주 인도 대사
  • 마르틴 클레멘스(1939년생), 작센 정치인(기민련), 전 작센 주의회 의원
  • 데이비드 길(1966년생),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 재임 당시 연방 대통령실 실장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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