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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전투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어난 홍콩에서의 전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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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전투(영어: Battle of Hong Kong, 일본어: 香港の戦い 혼콘노타타카이[*]), 혹은 중국에서의 명칭 홍콩 방어전(중국어: 香港保衛戰 샹강바오웨이잔[*], Defence of Hong Kong) 또는 홍콩 함락(Fall of Hong Kong)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 전쟁 극초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첫 전투 중 하나이다. 같은 날 아침 진주만 공격이 일어남과 동시에 일본 제국은 대영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곧바로 대영제국의 왕령 식민지였던 영국령 홍콩을 공격했다. 당시 홍콩 주둔군은 영국군, 인도군, 캐나다군 및 보조 방위군과 홍콩 자원방위대(HKVCD)로 구성되었다.
홍콩 주둔군은 전투 시작 일주일만에 가우룽과 신제 두 영토를 포기했다. 또한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마지막으로 남은 영토인 홍콩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영국령 홍콩이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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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관점
영국은 1921년 영일 동맹의 효력이 정지되면서 처음으로 일본을 적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위협이 더욱 커졌다. 1938년 10월 21일 일본이 광저우시를 점령하며 홍콩이 포위되었다.[8] 영국의 국방연구에서는 일본이 공격한다면 홍콩을 지켜내기 어렵다고 결론내렸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쭈이주완 방어선을 비롯한 홍콩 내 여러 방어 거점을 보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1940년까지 영국은 홍콩 주둔군 병력을 상징적인 규모로 확 줄이기로 결정했다. 영국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인 로버트 브룩포팜경은 제한된 증원으로도 주둔군이 일본의 공격을 지연시켜 다른 곳에서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주장했다.[9] 윈스턴 처칠과 참모진은 홍콩을 전초기지로 규정하고 더 많은 병력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941년 9월에는 이전의 결정을 뒤집고 추가 병력 증원이 일본에 대한 군사적 억지력을 만들고 영국이 식민지 방어에 진지하게 보여 중국의 장제스를 안심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9]
홍콩 방어계획은 신제와 가우룽에서 지연작전을 벌여 이곳의 중요 인프라와 상점을 이용하지 못하게 미리 파괴한다는 전략이었다. 쭈이주완 방어선은 최소 3주는 버틸 수 있다고 예상했으며 이후에는 모든 수비군이 홍콩섬으로 철수해 싱가포르 혹은 필리핀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홍콩섬을 방어하고 항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계획을 세웠다.[10]
미 육군 사관학교의 역사교과서에 따르면 "일본군의 광저우, 하이난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타이완 점령은 홍콩에서 첫 교전이 일어나기 한참 이전부터 홍콩의 운명을 사실상 결론지었다"고 말한다.[11][12] 하지만 홍콩 주둔 영국군은 상대인 일본군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일본이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는 평가를 "매국적"이며 "불복종적 행위"라고 경시했다.[13]
교전 이전 홍콩에 파견된 미국 최고위 관료인 로버트 워드 미국 영사는 홍콩 주둔군이 빠르게 붕괴된 이유를 영국 현지 사회나 중국인이 전쟁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했다.[14] 워드는 "(영국 통치자) 일부는 홍콩을 중국인에게 넘기기보다 일본인에게 넘기는 게 좋다고 솔직히 말했는데, 이는 중국인을 고용해 식민지를 방어하기보다 일본에게 그냥 홍콩을 넘기겠다는 뜻이었다"며 홍콩을 통치하는 고위관료의 편견에 찬 태도를 비판했다.[15]
전투를 목격하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 육군 부군수관인 레이놀드 컨던 대령은 교전 이전 군사적 준비와 이후 작전 수행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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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서열
연합국 측
인도군

1937년 6월 라즈푸트연대 제5, 제7대대가 홍콩에 주둔하기 시작했고[25] 뒤이어 1940년 11월에는 펀자브연대 제2, 제14대대가 홍콩에 주둔하기 시작했다.[26][27] 또한 인도군은 인도인(시크교) 포수가 있는 홍콩 및 싱가포르 왕립포병연대와 같은 여러 해외군 연대와 하나로 통합되었다.[28][29] 홍콩 노새군단은 거의 대부분 도그라스인과 펀자브 무슬림으로 구성되었다.[30] 인도 의무대의 의료진은 전투 중 부상당한 사람을 도왔다. 홍콩에서 근위요원으로 보냈던 인도 출신 전직 군인도 "끔찍할 정도로 엄청난 사상자"를 봤다고 말했다.[31]
홍콩 및 싱가포르 왕립포병연대
스톤커터스섬, 바이사완, 리먼 요새, 거롄천산, 바오추이위안(벨처스), 모싱령(데이비스산), 주빌힐, 보카라, 스탠리 등에 배치된 해안포대가 전투가 종료되거나 항복할 때까지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한 포병 지원을 제공했다.[32][33] 인도에서 모병한 병력으로 구성된 홍콩과 싱가포르 왕립포병연대는 홍콩 전투에서 많은 사망자를 냈으며 사이완 전쟁기념관 추모묘지 입구의 패널 설명에서는 전사 144명, 실종 45명, 부상 10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34]
캐나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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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추가 읽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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