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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옹주
조선 인조의 장녀, 최악의 악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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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옹주(孝明翁主, 1638년[1] ~ 1700년)는 조선의 왕족으로 인조의 장녀이며, 귀인 조씨 소생이다.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하였으나 후에 작위가 삭탈되어 '김세룡의 처'로만 불렸다.
생애
인조의 유일한 딸[2]로, 인조의 총애가 컸다.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1647년 효명옹주(孝明翁主)에 봉해졌다.[3] 같은 해 인조는 옹주의 신랑감을 간택하게 했는데 귀인 조씨는 딸을 당시 집권당이던 서인 낙당의 당수인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시키기 위해 김자점의 동의 하에 김세룡의 사주팔자를 조작했고 그 결과 김세룡은 옹주의 부마로 선발되었다.[4] 옹주의 어머니인 조씨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혼인에 쓰인 옷과 물건이 무척 호화로웠다.[5]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효명옹주는 자기중심적이고 행동이 방자했는데 궐 안에 잔치가 벌어지자 이복오라비 인평대군의 처인 복천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6][7][8] 이때 인조는 옹주의 편을 들어 딸이 윗자리에 앉도록 했는데 이 일 이후로 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6] 또 옹주는 혼인 후에도 2년간 궁에서 살았으며 1649년에야 비로소 출궁하여 사가에서 생활했다.[4]
인조 사후 1651년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 일에 관해 여종들을 추국할 때 효명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대궐과 이복오라비인 인평대군의 집에다 뿌리고 흉한 물건을 궁궐 주변에 묻었다는 자백이 나왔다.[9] 이에 효명옹주와 남편 김세룡을 국문하라고 요청했으나 효종은 김세룡만 국문하였다.[10] 남편 김세룡, 시조부 김자점이 사형당하자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처(김세룡의 처)라 불리게 됐다. 이후 통천으로 유배되었으며[11] 이듬해인 1652년 통천의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이천으로 옮겨졌다.[12] 1655년에는 효종의 명으로 유배지를 교동으로 옮겨 동생들인 숭선군, 낙선군과 함께 살게 하였고[13] 마침내 1658년에 석방하였다.[14] 옹주는 평생을 감시속에 살다가 1700년(숙종 26년) 64세의 나이로 죽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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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왕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조부 : 추존 원종(元宗, 1580 ~ 1619)
- 조모 : 추존 인헌왕후 능성 구씨(仁獻王后 綾城 具氏, 1578 ~ 1626)
- 아버지 : 제16대 인조(仁祖, 1595 ~ 1649, 재위 1623 ~ 1649)
- 외조부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기(慶尙右道 兵馬節度使 趙琦, 1574 ~ 미상)
- 외조모 : 정부인 청주 한씨(貞夫人 淸州 韓氏)[16]
시가 (구)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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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 옹주가 등장하는 작품
-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 (JTBC, 2013년 배우: 이채미 → 이영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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