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효순왕후
조선 진종의 왕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효순왕후 조씨(孝純王后 趙氏, 1715년 12월 28일(음력 12월 14일) ~ 1751년 12월 20일(음력 11월 14일))는 영조의 장남이자 추존 왕인 진종(眞宗, 효장세자)의 비이며, 정조의 양어머니이다.
Remove ads
효장세자 사후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효순현빈(孝純賢嬪)의 시호를 받았다. 조카인 세손 산(정조)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됨에 따라 승통세자빈이 되었다가, 정조가 즉위하여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하였으며, 대한제국 때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격상되었다.
Remove ads
생애
요약
관점

효순왕후의 아버지인 조문명
1716년(숙종 42년) 1월 8일,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태어났으며, 1727년(영조 3년) 정식 간택을 통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효장세자와 가례를 올렸다.[1] 그러나 다음해인 1728년(영조 4년) 효장세자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으므로 후사는 두지 못했다.[2]
1735년(영조 11년),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세자빈 조씨를 더 이상 빈궁으로 칭할 수 없으므로, 수빈 한씨(粹嬪 韓氏)와 덕빈 윤씨(德嬪 尹氏)의 고사를 따라 세자를 여읜 세자빈에게 빈호를 내려 현빈(賢嬪)으로 봉하였다.[3]
영조는 자녀 중에 딸 화평옹주와 며느리 현빈이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준다며 총애하였다.[4] 영조는 청상과부가 된 현빈을 안타까워하며 아껴주었고, 현빈은 영조가 밤을 좋아하여 밤을 직접 삶아서 올리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록을 쓰면서 '현빈이 나를 먹이려고 늘 직접 밤을 삶았는데 영원히 졸서(卒逝)하던 날조차 삶아 놓은 밤이 소반에 남아 있었으니, 이는 현빈이 그날도 진상하려 삶아 놓았다가 병이 위독해져 하지 못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5]
1751년(영조 27년)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建極黨)의 동실인 의춘헌(宜春軒)에서 병사하였다.[6] 개창(옴병)과 토황증의 합병증이었다.
영조가 지은 행록에 의하면 효장세자의 기일(忌日)이 바로 현빈의 시어머니인 정빈 이씨의 기일과 같은 날이라, 효장세자 기일과 정빈 이씨의 기일을 전후해서 매년 소식(素食, 거친밥을 먹음)을 하였는데 그러면 토황(吐黃, 구토와 함께 누렇게 변하는 병)하는 병이 생겼고, 그 토황증이 계속 쌓였었다고 한다.[5]
사후
시호는 효순현빈(孝純賢嬪)이며, 1752년(영조 28년)에 효장세자의 묘에 합장되었다.[7]

“ | 내가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것은 세상에 누군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없겠는가마는, 나와 빈의 사이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서로 마음을 알아주면서 지낸 지가 이제 25년이나 되었는데 무신년(1728년)에 눈물이 뒤범벅되어 효장세자의 행록을 지었는데, 내가 이제 노쇠한 나이에 전후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
” |
— 《효순현빈묘지명(孝純賢嬪墓誌銘)》, 영조 지음 |
1764년(영조 40년)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함에 따라 1776년(영조 52) 1월 27일 영조의 특명으로 승통세자빈의 호를 얻었으며,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 되었다. 1776년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여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면서 현빈 또한 효순왕후(孝純王后)로 추존되었다.[8] 묘소는 영릉(永陵)으로 격상되었으며 파주 삼릉 중 하나이다.
1908년(융희 2년) 대한제국 순종 때 소황후(昭皇后)의 시호를 받고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추존되었다.[9]
Remove ads
가족 관계
Remove ads
효순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
각주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