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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홍씨
조선 중종의 후궁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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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홍씨(熙嬪 洪氏, 1494년 5월 27일(음력 4월 14일) ~ 1581년 12월 11일(음력 11월 6일))는 조선 중종의 후궁이며 금원군과 봉성군의 생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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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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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과 가계
본관은 남양이며, 1494년(성종 25년) 홍경주(洪景舟)와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경주는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운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남양군(南陽君)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안동 권씨는 권금성(權金成)의 딸이며 정인지의 외손녀이다. 이모부(姨母夫)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전성군(全城君) 이한원(李翰元)이다.
후궁 시절

희빈 홍씨의 아버지로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1506년(중종 1년) 입궁하였는데, 홍경주가 반정 공신이었으므로 정치적인 이유에서 종2품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아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후 소의(昭儀)와 귀인(貴人)을 거쳐 희빈(熙嬪)에 책봉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얻어 아버지의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 되는 한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당시 조정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를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趙氏)가 왕이 됨)' 네 글자를 벌레가 파먹게 한 뒤, 이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이며 조광조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중종 사후
1545년(명종 즉위년), 윤여해(尹汝諧)과 유희령(柳希令)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으나 선왕의 총애를 생각하여 무마되었다.[1] 이후 사가로 나와 살았는데, 당시 아들 봉성군이 중종의 왕자들 가운데 총명하여 역모의 추대자로 자주 언급되는 등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2]
중종과의 슬하에 5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3명은 조졸하였고[3], 금원군과 봉성군만이 장성하였으나, 봉성군은 옥사에 연루되어 끝내 사사되었다.[4]
1581년(선조 14년) 11월 6일 사망하였다. 생몰년이 확인되는 조선의 후궁 가운데 연산군의 후궁인 숙의 윤씨와 더불어 가장 장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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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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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홍씨가 등장하는 작품
참고자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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