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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알제리 독립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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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알제리 독립 국민투표(프랑스어: Référendum sur l'indépendance de l'Algérie)는 1962년 7월 1일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실시된 독립 국민투표이다.

1962년 4월 국민투표에서 프랑스가 에비앙 협정을 승인한 데 따라 실시된 국민투표로, 투표의 설문은 알제리 유권자들에게 알제리가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립국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투표율 91.88%, 찬성 99.72%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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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54년 11월 1일 투생 루즈 공격과 함께 국민해방전선 (FLN)에서 알제리 전쟁을 일으켰다. 1958년 5월 알제리 위기로 인한 프랑스 국내의 갈등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프랑스 제4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다.[1] 프랑스군이 알제리 독립군을 제압하기 위해 잔혹한 수단을 동원하는 바람에 프랑스 국내에서의 여론을 악화시키는 것은 물론, 프랑스를 향한 국제사회의 시각도 나빠지는 계기로 작용했다.[2][3]
1960년 알제와 기타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국민해방전선과의 협상을 승낙하였다. 알제리에 자결권을 허가할지에 관한 1961년 프랑스 국민투표가 유권자의 75% (알제리 유권자 70%)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962년 3월 양국간의 협상 끝에 에비앙 협정이 체결되고, 4월 8일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91%의 찬성으로 협정이 승인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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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알제리 독립 국민투표의 설문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알제리가 1962년 3월 19일 선언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프랑스와 협력하에 독립국이 되기를 원하는가?"
여파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프랑스는 7월 3일 알제리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 결정은 다음날 프랑스 관보에 게재되었다.[5] 알제리 독립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알제 침공에 나선 지 132주년이 되는 7월 5일을 알제리 독립기념일로 선언했다.[6]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동시에 유럽 공동체의 경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7]
에비앙 협정 제3장 3절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15년간 메르스엘케비르 해군 기지의 운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8] 이를 제외한 나머지 프랑스군은 1967년을 기해 철수되었다.
1962년 캐나다 역사가 존 C. 케언즈 (John C. Cairns)는 알제리 독립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어떤 면에서는 지난 한 해가 가장 최악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조차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도처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잔인성은 그 어느 때보다 터무니없고 야만적이었다. 1961년 희망찬 봄부터 1962년 3월 18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지난 한 해는 섀도복싱, 거짓 위협, 항복, 살인적인 히스테리의 계절이었다. 프랑스령 알제리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그 고통은 유럽제국주의의 지난 날에서 볼 법한 추악한 공포와 잔인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962년 봄, 제국이란 이름의 불행한 시체는 여전히 전율과 분노에 휩싸여 스스로를 학살로 얼룩졌다. 적어도 7년 반에 걸친 그 죽음의 모든 과정은 식민주의 역사상 가장 한심하고 추악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얽히고설킨 분쟁의 그물 속에서 주요 인물 가운데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분쟁에서 승리한 자도, 분쟁을 다스린 자도 없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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