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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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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7일 우크라이나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어떤 후보도 과반수의 득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2월 7일에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빅토르 야누코비치 야당 대표 사이에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

2월 14일, 야누코비치는 득표율 50%로 대통령 당선자로 선언되었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104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공식 결과 발표 후 30일 이내에 취임해야 했다.[1] 의회는 이후 야누코비치의 취임식을 2월 25일로 예정했다.[2]

2월 17일, 우크라이나 최고행정법원은 티모셴코의 항소에 따라 선거 결과를 정지시켰다. 법원은 야누코비치를 선거 승자로 선언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정지시켰지만, 그의 취임식을 연기하거나 취소하지는 않았다.[3][4][5] 2월 20일, 티모셴코는 항소를 철회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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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우크라이나에서는 이전 두 번의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전통적으로 10월에 진행되었다.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기 선거는 대통령 임기 5년째의 마지막 달 마지막 일요일에 실시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임기가 조기 종료될 경우,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직이 공석이 된 날부터 90일 이내에 실시된다.

대통령의 사임, 건강 문제, 탄핵 또는 사망 시 조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시민에 의해 5년 임기로, 보편적, 평등적, 직접 투표권에 의거하여 비밀 투표로 선출된다.

입후보를 원하는 후보자는 35세 이상인 우크라이나 시민이어야 하며, 투표할 권리가 있고, 선거일 이전 10년 동안 우크라이나에 거주했으며, 우크라이나 헌법 제103조에서 요구하는 대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2009년 4월 1일, 최고 라다는 2009년 10월 25일을 1차 투표일로 지정했다. 일주일 이내에 유셴코 대통령은 최고 라다의 10월 25일 날짜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항소했다. 대통령의 항소는 2005년 1월 23일 그의 취임이 5년 임기의 시작이었으며, 따라서 다음 대통령 선거는 헌법 제103조에 따라 2010년 1월 23일 이전의 마지막 일요일로 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7]

2009년 5월 13일, 법원은 유셴코의 손을 들어주어 10월 25일 선거일을 취소했다.[8] 2009년 5월 14일, 지역당 대표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대통령 선거가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져야 한다고 밝혔다.[9][10][11]

2009년 6월 23일, 의회는 선거일을 2010년 1월 17일 일요일로 재조정했으며, 회의실에 등록된 442명의 의원 중 399명의 의원이 "우크라이나 대통령 정기 선거 지정에 관한" 결의안에 "찬성" 투표를 했다.

내무부 장관 유리 루첸코는 2009년 9월 21일, 이번 대통령 선거 유권자 명단이 "이전 선거"보다 더 질적이고 "명확"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중 이름"이 명단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12] 같은 날 지역당은 그 명단에 많은 오류가 있으며, 남부 우크라이나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유권자 수가 감소했고,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0.5~1% 증가했다고 불평했다.[13] 이것은 우크라이나 선거에서 유권자 국가 등록부가 사용되는 첫 번째 사례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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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제도

요약
관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은 결선투표제 다수대표제를 통해 선출된다. 1차 투표는 2010년 1월 17일에 실시되었다. 1차 투표에서 어떤 후보도 50% 이상의 득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득표율이 가장 높은 두 후보가 2010년 2월 7일에 치러진 2차 투표에서 맞붙었다.[14]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가장 많은 표(48.96%)를 얻었으며 승자로 선언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5] 우크라이나 법에 따르면, 당선된 대통령은 투표 선언 후 30일 이내, 즉 2010년 2월 17일 이전에 선언되어야 한다.

2009년 7월 24일, 최고 라다는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 공식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을 120일에서 90일로 단축했다.[16][17] [18] 퇴임하는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새 법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에 항소를 제기했지만, 항소의 근거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19] 의회 의장 볼로디미르 리트빈은 대통령의 서명 거부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법안에 서명했다.[20]

대통령 비서실 부실장이자 법률 담당 대변인인 마리나 스타브니추크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의 잠재적 중단 문제를 고려할 심각한 정치적 또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밝혔다.[21]

대통령 선거 개정법은 후보자들이 ₴2,500,000 (약 308,000 미국 달러)의 공천 예치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예치금은 2차 투표에 진출한 상위 2명의 후보자에게만 환불된다.

2009년 10월 19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225개의 지역 선거구를 구성했다.[22]

2009년 10월 20일,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는 새로운 대통령 선거법의 다섯 가지 측면이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해외 유권자들은 더 이상 투표를 위해 우크라이나 영사관에 등록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법원은 후보자 등록이나 선거 진행과 관련된 어떠한 신청이나 항소도 제한 없이 심리할 권리를 유지한다. 부재자 투표의 취소는 90일 선거 기간 및 ₴2.5백만 예치금과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개정된 법안이 그대로 유지되므로 선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23][24]

2009년 12월 21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13개의 해외 투표소를 설치했다.[25]

유권자들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집에서 투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26]

비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우크라이나에서 정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 드는 예산을 ₴15억으로 추정했다.[27] (약 2억 미국 달러)이며, 후보자들이 선거 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데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11월 2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 총 ₴13억 1천 4백만 흐리우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2009년에 1억 9천 2백 2십만 흐리우냐, 2010년에 11억 2천 2백만 흐리우냐가 포함된다.[28]

정치 분석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각 대통령 후보는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최소 1억 5천만~2억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 여기에는 언론 기사 구매, 시각 광고, 유세, 정치 자료 인쇄, 선거 위원회와의 작업이 포함된다.[29]

우크라이나 유권자 위원회 위원장 올렉산드르 체르넨코는 또한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 운동에 10억 달러를 지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30]

결선 투표 비용은 1억 1,900만 달러로 추정된다.[31]

시간표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CEC)는 선거 수행을 위해 다음 시간표를 설정했다.[32][33]

  • 10월 19일: 공식 90일 선거 운동 기간 시작
  • 10월 20일 ~ 11월 6일: 후보 지명 접수 시작
  • 11월 9일: 후보 지명 서류/제출 마감

CEC는 후보 지명을 평가하고 승인 또는 거부하는 데 5일이 주어진다.

  • 11월 11일: 후보자 서류 수정 제출 마감
  • 11월 13일: CEC, 후보자 등록 확정
  • 11월 15일: CEC, 후보자 지명 목록 게시

CEC는 모든 후보자에게 유권자 명단 인증 사본을 제공한다. 등록 후 3일 이내에 후보자는 자산 및 소득 명세를 제출해야 한다. 후보자는 등록 확정 후 1일부터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

  • 12월 9일: 해외 투표소 설치.[34]
  • 12월 15일: CEC, 인쇄를 위한 투표용지 형식 승인.
  • 12월 21일: 후보 사퇴 마감.
  • 1월 2일: 선거 전 여론조사 발표 마지막 날.
  • 1월 9일: 모든 투표용지 인쇄 및 투표소/선거구 배포 준비 완료.
  • 1월 15일: 투표일 전 공개 선거 운동 마지막 날
  • 1월 17일: 선거 (1차 투표) 투표 시작 오전 8시, 마감 오후 10시
  • 1월 22일: 해외 및 지역 투표소 집계 완료
  • 1월 27일: 투표 결과 결정 및 선거 선언

어떤 후보도 전체 득표의 50% 이상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두 후보가 2차 투표에서 맞붙었다. 2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한다.

  • 2월 7일: 최종 결선 투표
  • 2월 17일: 투표 후 10일 이내 또는 공식 선거 의정서 접수 후 3일 이내에 선거 선언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104조에 따르면, 당선된 대통령은 선거 결과 발표 후 30일 이내에 우크라이나 의회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해야 한다.

  • 2월 25일: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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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요약
관점

다음 후보자들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 (투표용지 순서)[35] 총 18명의 후보자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36]

제외된 후보자

총 16건의 후보 등록 신청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거부되었다.[74]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올렉산드르 호르디추크, 올레나 오스나치, 올렉산드르 루잔, 한나 코스티우, 올렉산드르 바셴코, 올렉산드르 오호로드니코프, 바실 한둘라, 유리 페틀레바나, 페트로 레칼로, 아나톨리 폴리슈크, 미하일로 하마뉴크, 올렉산드르 브레티크, 아르템 폴레자카, 올레흐 오멜첸코, 나탈리아 비트렌코,[56] 미콜라 멜니첸코, 세르히 마르티얀, 세르히 셰티닌의 등록을 거부했다. 거부 사유는 서류 오류, 자격 미달 또는 필요한 ₴250만 후보 지명 예치금 미납 때문이었다.[75][76][77][78]

정당 및 후보자의 선거 출마 지명은 2009년 11월 6일에 마감되었다.[32] 총 18명의 후보자가 지명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09년 11월 11일까지 서류를 처리하고 선거 목록을 확정해야 했다.

선거 운동

요약
관점

공식 대통령 선거 운동은 2009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으며, 후보 지명은 10월 20일부터 11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비공식" 선거 운동은 이미 2009년 여름에 시작되었는데, 아르세니 야체뉴크를 위한 선거 자료를 배포하는 변화를 위한 전선의 텐트, "다른 사람들은 문제를 만들고, 그녀는 일한다"는 문구(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의 색상과 글자체)가 적힌 대형 빌보드,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도시에서 전시된 세르히 티히프코의 사진, 그리고 국영 TV에서 방영된 율리야 티모셴코볼로디미르 리트빈의 TV 광고가 있었다.[79][80] 티모셴코에 따르면 "그녀가 일한다" 빌보드는 조국당에서 비용을 지불했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또한 "사회적"이었다. 지역당 부대표 안드리 파루비는 검찰총장실에 티모셴코 광고의 자금 출처를 조사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는 공공 자금이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80]

우크라이나는 선거 캠페인의 성공이 선거 캠페인에 적용되는 전문성 수준과 정치적 스핀 기술에 얼마나 달려 있는지 여러 번 입증했다.[81]

가장 인기 있는 후보는 전 총리이자 야당 대표인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현 총리인 율리야 티모셴코이다.

대통령빅토르 유셴코의 지지율은 2004년 52%에서 우크라이나 여론 조사에서 3% 미만으로 급락했다. 대부분의 정치 평론가들은 그가 재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심각한 약자라고 간주한다.[82]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83%는 유셴코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83]

2009년 4월 5일, 전 최고 라다 의장인 아르세니 야체뉴크는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84] 그의 인기는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에 이어 3위인 12~14%로 서서히 상승했다.[85]

옥스포드 애널리티카에 따르면, 유셴코 대통령과 티모셴코 총리의 협력 관계는 유셴코가 재선을 보장할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외의 다른 파트너를 찾는 과정에서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86] 유셴코가 2005년 9월 8일 티모셴코를 총리직에서 해임한 이후, 티모셴코와 유셴코의 관계는[87][88][89][90]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을 포함한 관계는 적대적이었다.[91] [92] 2009년 2월 11일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티모셴코는 최근 대통령과의 갈등이 정치적 경쟁이지 이념적 적대감이 아니라고 말하며, "다음 대통령 선거를 위한 선거전이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강조했다.[93] 2009년 2월 10일 브뤼셀 방문 중, 볼로디미르 리트빈 최고 라다 의장은 이에 동의했다.[94] 2009년 2월 말, 유셴코 대통령은 모든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에게 "7월 1일까지 대통령 선거 운동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95][96]

2009년 6월 16일, 티모셴코는 유셴코, 야체뉴크, 야누코비치가 (사업가이자) 로스우크르에네르호 소유주인 드미트로 피르타시의 자금으로 같은 선거 운동 본부를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97][98][99]

티모셴코는 2009년 6월 22일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팀워크가 있다. 대통령의 전문적인 조언과 지원은 어려운 시기에 정부를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100]

2009년 8월 11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빅토르 유셴코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101] 현 우크라이나 당국의 "반러시아적 입장"과 관련된 여러 우려 사항을 제기했다. 러시아 대통령의 발언은[102] 분석가들과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 의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정 간섭으로 간주되었다.[103][104][105][106][107][108][109]

2009년 9월 12일, 율리야 티모셴코를 지지하는 "우크라이나의 심장과 함께"라는 투어가 키이우 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에서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의 가장 인기 있는 가수들과 밴드들이 이 투어에 참여했다.[110][111][112]

2009년 9월 14일, 우크라이나 공산당,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통합), 정의당, 좌익연합좌익 및 중도좌익 블록을 창설하고 대통령 선거에 단일 참여하기로 합의했다.[113][114]

키이우 페체르스키 지방법원은 2009년 9월 22일, (지역당이 만들었다고 주장되는) 티모셴코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비디오에 대응하여 티모셴코에 대한 "어떠한 불공정한 광고"도 금지했다. 이 비디오는 티모셴코의 주요 선거 슬로건인 "그녀가 일한다"를 조롱했다고 보도되었다.[80]

2009년 10월, 서우크라이나 인텔리겐치아 대표들은 유셴코, 야체뉴크, 흐리첸코 및 "국민 민주 세력의 다른 대표자들"에게 티모셴코를 지지하여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115]

2009년 10월 6일, 재임자인 유셴코 대통령은 선거 운동에서 정부에 이점을 주기 위해 지역 텔레비전라디오 회사를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116]

2009년 10월 17일,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은 좌익 및 중도좌익 정치 세력 블록 창설 결정을 지지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 대표 페트로 시모넨코를 좌익 정치 세력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단일 후보로 지지했다.[117]

10월 19일은 선거 운동 90일 기간의 공식 시작이었다.

10월 20일부터 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었다. 올레흐 랴보콘이 공식적으로 첫 번째 후보로 지명되었다.

10월 20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의회 의원이 최고 라다의 동의 없이 형사상 책임을 지거나 구금 또는 체포되지 않도록 하는 의원 면책 특권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헌법을 개정하기로 투표했다 (438명 중 390명 찬성). 의원 면책 특권만 제거하자는 이전 제안은 부결되었다. 제안된 새로운 조항은 대통령 면책 특권도 제한한다.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구금되거나 체포될 수 없지만, 범죄 유죄 판결 시 자동으로 직위를 상실한다. 제안된 개정안은 검토를 위해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로 전달되었으며, 2010년 2월에 의회에서 재확인되어야 한다.[118]

정치 분석가이자 유럽 외교 관계 위원회의 선임 정책 연구원인 앤드루 윌슨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후보인 아르세니 야체뉴크가 8월 13%에서 10월 9%로 지지율이 하락한 후 그의 급부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야체뉴크는 플랜 B를 고려해야 한다"[119]

11월 6일 후보 지명이 마감되었다. 같은 날, 빅토르 유셴코 보좌관은 최근 독감 발병으로 97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우려 속에서 1월 선거를 2010년 5월까지 취소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6개월 연장할 것을 제안했다.[120] 세계보건기구는 봄(4월에서 6월)에 2차 및 3차 감염 파동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121] 이는 유셴코의 제안된 취소에 대한 추가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비상사태가 선포될 경우 선거는 취소될 수 있다. 또한 2009년 11월 6일, 비상사태부는 독감 유행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 비상사태를 선포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122] 11월 9일 유셴코 대통령도 같은 말을 했다.[123][124]

국민 자위당 부대표인 세르히 루첸코는 2009년 11월 11일, 빅토르 유셴코가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 간의 결선 투표에서 과거의 라이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125]

2009년 12월 3일, 우크라이나 국립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 위원회는 특정 TV 채널이 모든 대통령 후보에게 동등한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126]

2009년 12월 11일, 유럽 국민당 (EPP)은 "우크라이나의 민주 세력"이 대통령 결선 투표에 진출할 가장 민주적인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전우크라이나 연합 "조국", 우리 우크라이나 인민 연합, 그리고 우크라이나 인민운동 (루흐)은 우크라이나의 EPP 파트너이다.[127]

2009년 12월 11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그의 지역당이 "정부 대표들이 현재 선거 위원회 위원장들을 "동기 부여"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승리 옵션을 모색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진술했으며, 부정 선거의 경우 지지자들에게 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로 갈 것을 촉구했다.[128]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은 헌법 개혁의 형태(의회제 대 대통령제 정부 시스템)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한다.[129]

쟁점

캠페인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 목록은 다음과 같다.

펜타 정치 연구 센터의 소장인 볼로디미르 페센코에 따르면, 여러 후보자들의 선거 공약에는 작은 차이만이 있었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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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요약
관점

2009년 11월 키이우 포스트의 기사에 따르면, 야누코비치의 돈바스에서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었고, 돈바스 유권자들은 주로 티모셴코의 집권을 막기 위해 야누코비치에게 투표했다.[135]

2009년 12월 15일 국제선거제도재단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빅토르 야누코비치(31%)가 율리야 티모셴코(19%)와의 대결에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136] 다른 모든 후보들은 5% 미만이었으며, 빅토르 유셴코는 3.5%에 불과했고 부정적 평가가 83%에 달했다. 이 조사는 또한 우크라이나인들이 국내 사회-정치 상황에 대해 비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74%는 우크라이나가 불안정의 길로 가고 있다고 믿었으며, 10명 중 9명 이상이 국내 경제(96%) 및 정치 상황(92%)에 불만족하고 있었다.

다른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역당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25.0% ~ 33.3%)가 유력 대선 후보 중 1위를 차지했으며,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 (15.5% ~ 18.4%)가 2위, 변화를 위한 전선 후보 아르세니 야체뉴크 (6.7% ~ 14.5%)가 3위를 차지했다. 현직 대통령인 빅토르 유셴코 (2.0% ~ 3.8%)는 우크라이나 대중의 인기 하락 이후 공산당 당수인 페트로 시모넨코 (3.4% ~ 4.5%)와 의회 의장 볼로디미르 리트빈 (1.4% ~ 5.8%)에 이어 멀리 6위를 기록했다.[137][138]

미국 기반 국제선거제도재단(2009년 11월 21~29일)이 실시하고 미국 국제개발처가 자금을 지원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빅토르 유셴코가 가장 높은 부정적 평가(83%)를 받았고,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가장 긍정적인 평가(42%)를 받았다.[139]

2009년 9월/10월 FOM-우크라이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투표율이 최소 85.1%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0] 2009년 12월 올렉산드르 야레멘코 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최소 70%의 투표율이 예상되었다.[141]

2010년 1월 2일은 1월 17일 1차 선거 전 15일 동안 선거 여론조사 보도가 금지되는 언론 봉쇄 기간의 시작이었다.[142]

1차 투표 여론조사

자세한 정보 여론조사기관, 날짜 ...

결선 투표 여론조사

자세한 정보 여론조사기관, 날짜 ...

출구조사

결선 투표 기간 동안 실시된 모든 출구조사는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야 티모셴코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보도했다.[163][164][165]

자세한 정보 여론조사 기관, 빅토르 야누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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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요약
관점

이 선거는 OSCE와 PACE를 포함한 모든 국제 선거 감시 기관에 의해 공정하고 유권자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지지되었다.[166][167] 선거를 감시한 모든 국제 기구에 따르면, 1차 투표와 관련된 부정 선거 혐의는 근거가 없었다. 그들은 선거 진행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민주주의 기준을 따랐으며,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지를 증명했다고 선언했다.[168][169][170]

2009년 12월 여론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인의 82%가 투표 조작을 예상했으며, 이러한 우려는 국제 및 국내 선거 참관인들 사이에서도 공유되었다. 후자는 또한 독립적인 출구조사의 부재를 우려했는데, 이는 투표 사기를 저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171]

율리야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총리이자 선거에 출마한 주요 후보 중 한 명은 "이 나라에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는 흔들림을 피하기 위해 어떠한 선거 결과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가 율리야 티모셴코가 아니라면, 나는 이 선택을 물론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밝혔다.[172]

전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도 3차 투표 가능성을 배제했다. 쿠치마에 따르면, "2004년 선거 운동 기간 중 3차 투표 개최 결정은 정치적인 것이었고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2004년 결정은 규칙의 예외였다."[173]

빅토르 유셴코 밑에서 전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빅토르 발로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능한 투표 조작에 대한 경고성 발언은 일부 후보자들의 조직적 약점을 직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법은 어떠한 선거 부정행위에도 신뢰할 수 있는 장벽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모든 대통령 후보는 지방 및 지역 선거 위원회에 두 명의 대표자를 보낼 수 있으며, 투표 및 개표를 감시할 관찰자를 임명할 수 있다.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후보자의 대리인도 투표 과정을 감독할 수 있다." "감독 도구는 차고 넘친다. 선거 부정행위에 대한 다른 효과적인 장벽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성원은 주요 의회 정당이 할당된 몫에 따라 임명된다]와 수많은 국제 참관인이다. 대중 매체와 NGO, 특히 우크라이나 유권자 위원회도 부정행위를 억제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최종 집계를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은 존경받는 여론 조사 기관이 실시하는 출구조사이다. 이 모든 것이 캠페인 기간 동안 활용될 것이다." 덧붙여 "더구나 18명의 대통령 후보가 있으며, 일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부정행위에 대한 어떠한 선언도 그러한 선언을 하는 사람들의 패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강한 의지와 강인함을 내세우는 후보자들이 그러한 선언을 가장 많이 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사실, 그러한 선언은 그들이 미래의 패배자와 외부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174]

빅토르 야누코비치율리야 티모셴코 후보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상대방이 부정 선거를 통해 선거에서 이길 의도가 있다고 서로 비난했다.[175][176] 2010년 1월 초,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투표 집계 과정에서 "행정적 압력"이 적용될 실질적인 위협이 있다고 경고했다. 빅토르 유셴코는 어떠한 세부 사항도 제공하지 않고 1차 투표에서 가장 높은 위조 위협이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에 의해 적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어떤 경우에도 2차 투표에 진출할 것이기 때문이다."[177]

빅토르 유셴코가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선거 운동을 지지하는 대가로 자신의 팀 구성원들을 위한 여러 정치적 직책을 확보하기 위해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거래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78] 빅토르 유셴코가 그 거래에 대한 뉴스가 국가 기밀이라고 선언하여 출판을 막으려 했다는 우려가 표명되었다.[179]

민주 이니셔티브와 우크라이나 사회학 서비스가 2010년 1월에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 미만이 대통령 선거가 공정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41.4%의 응답자는 선거 결과가 조작될 수 있다고 믿었고, 15.7%는 전체 투표가 조작될 것이라고 확신했다.[180] 같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는 금액이 적절하면 자신의 표를 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고, 1.9%의 응답자는 어떤 대통령 후보에게든 어떤 자금으로든 자신의 표를 팔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181]

한 표를 여러 번 던지거나 자신의 표를 파는 유권자는 최대 2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182]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국제 참관인들은 심각한 부정 선거의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투표와 개표가 공정했다고 밝혔다.[183]

국제 참관인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2009년 11월에 약 600명의 국제 참관인이 선거를 감시할 것으로 예상했다.[184] 유럽 안보 협력 기구 (OSCE)는 대통령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약 60명의 장기 참관인과 600명의 단기 참관인을 우크라이나로 보낼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OSCE에 선거 감시 초청장을 제출했다.[185] 이 선거 참관단은 포르투갈 정치인인 주앙 소아레스 (정치인)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의회 의장이 이끌었다. OSCE/ODIHR 장기 참관단은 2009년 11월 26일에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186] 2009년 1월 12일, OSCE는 급여 및 운송 서비스 자금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187]

유럽 연합 회원국들은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700명 이상의 참관인을 파견할 것이다.[188] 캐나다 우크라이나 재단[189] (캐나다 NGO[190])와 유럽 평의회 의회 (PACE)도 참관인을 파견할 것이다.[191] PACE 대표단은 헝가리 정치인 마차시 외르시가 이끌었다.[192] 11월 말, PACE 대표단은 선거가 조직의 기준을 충족할지 회의적이었다.[192] 2009년 12월 8일, PACE의 공동 보고관 레나테 볼렌드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정치를 계속 감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193] 볼렌드는 또한 우크라이나 의회에 대통령 선거법을 가능한 한 빨리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볼렌드는 우크라이나 선거법에 선거 위원회가 투표 당일에 선거인 명부를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이 포함된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이것이 부정 선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194]

폴란드 유럽 지정학 분석 센터는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외국인 혐오증의 징후를 감시하기 위해 20명의 참관인을 파견했다.[195]

2009년 12월 9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OSCE 선거 감시단과의 회의에서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가 대통령 선거를 조작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196]

유럽 선거 감시 기구 네트워크 (ENEMO) 소속 총 450명의 공식 참관인들이 선거를 감시할 것이다.[197]

파벨 코발유럽 의회 참관단 대표를 이끌었으며, 이 대표단은 10명으로 구성되어 유럽 안보 협력 기구 의회, 유럽 평의회, 북대서양 조약 기구 의회, OSCE 민주 제도 및 인권 사무소 (ODIHR) 참관단과 긴밀히 협력했다.[198]

총 3,149명의 국제 참관인들이 2010년 1월 17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를 감시했다.[199][200]

2010년 1월 18일, OSCE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2차 투표를 감시하기 위해 1차 투표와 동일한 수의 참관인을 파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01]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선거법을 국제 규범에 맞게 조정할 것을 촉구했지만[2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높은 수준"이며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고 평가했다.[203]

2차 선거 후 국제 참관인과 OSCE는 선거가 투명하고 정직했다고 평가했다.[204]

율리야 티모셴코 대통령 후보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요 선거 본부장인 세르히 파스칼로프에 따르면, 국제 참관인들은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대규모 불규칙성을 물리적으로 등록할 수 없었다. 파스칼로프에 따르면 6명의 외국인 참관인들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지역의 6개 선거구 469개 투표소에서 결선 대통령 선거를 감시했다.[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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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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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1차 투표는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졌다. 유권자 투표율은 약 67%로, 2004년 대통령 선거의 75%에 비해 낮았다. 1월 17일 치러진 1차 투표의 조기 개표 결과에 따르면, 야누코비치가 득표율 36%로 1위를 차지했다.[206] 그는 2위 (득표율 25%)를 차지한 티모셴코와 2010년 2월 7일 결선 투표에서 맞붙었다. 현직 대통령 빅토르 유셴코는 득표율 6%에 그쳐 세르히 티히프코와 아르세니 야체뉴크에 이어 5위를 기록하며 패배했다. 이들은 각각 득표율 13%와 7%를 기록했다.[207][208][209]

페트로 시모넨코, 볼로디미르 리트빈, 올레흐 탸흐니보크, 아나톨리 흐리첸코는 모두 1%에서 4% 사이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나머지 9명의 대통령 후보는 1% 미만의 득표율을 얻었다.[210]

분석가들은 두 후보 모두 2차 투표에서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예측했다.[211] 야누코비치는 2차 투표 전에 상대방과의 토론을 거부하며, 티모셴코는 총리로서 모든 말에 책임을 지거나 부엌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212] 모든 투표가 집계된 후,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야누코비치가 득표율 48.95%로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티모셴코는 45.47%를 얻었다고 선언했다.[213]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의원들은 즉시 이 결선 투표에서 체계적이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214][215][216][217]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율리야 티모셴코 간의 2차 투표는 2010년 2월 7일에 치러졌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으며, 국립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그가 49%의 득표율로 티모셴코의 46%를 앞섰다.[218] 모든 투표가 집계된 후, 야누코비치는 12,481,268표를 얻었고 티모셴코는 11,593,340표를 얻었다.[219] 무효표는 1.19%였고, 4.36%의 유권자는 "모두 반대"에 투표했다.[219] 키이우에서 "모두 반대"를 선택한 유권자의 수는 약 8%에 달했다.[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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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투표 분석 결과, 선거 기간 동안 전통적인 지리적 유권자 패턴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티모셴코는 야누코비치의 전통적인 동부남부 우크라이나 지지 기반에 침투했고, 야누코비치도 티모셴코의 전통적인 서부와 중부 우크라이나 지지 기반에 침투했다.[221] 더 많은 여성이 티모셴코보다 야누코비치에게 투표했다.[222]

반응

선거 며칠 후, 야누코비치는 아르메니아, 오스트리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불가리아, 중화인민공화국, 이집트,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조지아,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이스라엘, 이탈리아,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리비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네덜란드, 파라과이,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페인, 스웨덴, 타지키스탄, 튀르키예, 영국, 미국, 우즈베키스탄, NATO, 유럽 연합 지도자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223][224][225][226][227] 그러나 티모셴코는 패배를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티모셴코의 당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약속했다.[204] 2010년 2월 17일, 우크라이나 행정법원은 율리야 티모셴코의 항소에 따라 선거 결과를 정지시켰다. 법원은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발표한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정지시켰다.[228][229] 티모셴코는 2010년 2월 20일, 키이우 고등행정법원이 크림반도 선거구 문서 검토 및 선거 및 법 집행 관계자 심문을 요청한 그녀의 청원을 기각하자 항소를 철회했다.[6] 같은 날 (2월 20일) 티모셴코는 그러한 항소에 대한 법적 규정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 2차 투표 결과를 우크라이나 대법원에 이의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230] 비록 티모셴코는 또한 "정직한 법원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합법적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인민의 의지가 조작되었다고 평가할 것"이라고 진술했지만 말이다.[231]

여파

티모셴코의 당은 개표 과정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3만 개 투표함 중 1,000개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90만 표 가량[232])의 결과를 이의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183] 티모셴코 진영이 인용한 위반 사항으로는 재택 투표와 유권자들을 투표소로 버스 태워 보내는 행위[232]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법적으로 명시적으로 허용된 것이었다. 야누코비치 당 활동가들은 2차 선거 며칠 후 우크라이나 고등행정법원과 키이우 행정항소법원 건물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233]

2010년 2월 10일, 야누코비치는 티모셴코에게 시위를 포기하고 총리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했다.[217] 2010년 2월 9일, 야누코비치는 보리스 콜레스니코프가 자신이 선호하는 차기 우크라이나 총리라고 밝힌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조기 의회 선거우크라이나 의회가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할 경우 임박할 것이라고 했다. 야누코비치는 또한 당시 의회에서 가장 큰 정파로서 그의 당이 총리를 지명할 자격이 있다고 진술했다.[234] 2월 15일, 야누코비치는 "나는 (차기 총리로서) 티히프코의 후보를 배제하지 않는다. 티히프코는 다음 주 의회에서 논의될 목록에 있다"고 말했다.[235]

2010년 2월 16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야누코비치의 대통령 취임식을 2010년 2월 25일로 확정했다.[236] 2010년 2월 17일, "우크라이나 고등행정법원"은 율리야 티모셴코의 항소에 따라 선거 결과를 정지시켰다.[228][229]

2010년 2월 20일, 티모셴코는 "우크라이나 고등행정법원"이 그녀의 청원을 기각하자 항소를 철회했다:[230]
— "우크라이나 유권자 등록부"에 없었지만 투표한 약 30만 명의 유권자에 대해;
— "권리 없이" 집에서 투표한 약 130만 명의 유권자에 대해;
— 동부 지역(도네츠크, 루한스크, 하르키우 지역, 크림반도 등) 선거에서의 위조에 대해 — 법 집행 관계자에 의해 확인되었다.[6]
티모셴코는 "나와 나의 정당은 야누코비치를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으로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정직한 법원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고, 인민의 의지가 조작되었다고 평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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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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