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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디 크레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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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디 크레디(이탈리아어: Lorenzo di Credi, 1456년 또는 1459년~1537년 1월 12일)는 종교화와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인근 도시로 몇 차례 이동한 것을 빼고는 거의 평생을 피렌체에서 보냈다. 그는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시기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일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다 빈치가 그의 화풍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
그는 베로키오 밑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의 주요 조수로 성장했으며, 1488년 스승 베로키오가 사망하자 스무 살 후반의 나이에 그의 작업장을 물려받았다. 그는 주로 스승의 양식을 이어갔고, 최소한 152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 그 무렵에는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2] 그가 직접 프레스코화를 그린 적은 없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작업장에서 프레스코 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 조르조 바사리는 그가 모든 대형 작품을 피하고, 세밀한 마무리를 갖춘 소형 작품을 선호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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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로렌초는 1456년 또는 1459년에 피렌체에서 금세공인 안드레아 다 오데리고(Andrea d' Oderigo)의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1480/81년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5] 그는 결국 베로키오의 주요한 조수가 되었고, 1482~1483년 스승이 부재한 동안 작업장을 관리했으며, 1488년 베로키오가 사망하자 그의 작업장을 이어받았다.[6] 그는 베로키오를 대신해, 1475년에 의뢰된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유명한 《피아차의 성모》를 맡아 1485년부터 1491년 사이에 완성했다.

로렌초의 초기 독립 작품에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수태고지》, 토리노 사바우다 미술관에 소장된 두 점의 《성모와 아기》,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성모와 아기》,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미술관의 《아기 경배》 등이 있다. 성숙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산타 마리아 마달레나 데이 파치를 위해 1493년에 제작한 《성모와 성 율리아노, 성 니콜라오》(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산타 키아라를 위해 그린 《목동들의 경배》(1487, 현재 우피치 미술관 소장), 키오스트로 델로 스칼초를 위한 《그리스도의 세례》(현재 피에솔레 산 도메니코 수도원 소장)가 있다. 1501년에는 피에솔레 산 도메니코 수도원에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제대화 일부를 다시 제작했다. 후기 작품으로는 피스토이아의 체포 병원을 위한 제대화(1510~12, 현재 피스토이아 시립박물관 소장), 괴팅겐 대학에 소장된 미완성 《십자가형》, 하버드 대학 미술관에 소장된 1508년작 《수태고지》 등이 있다.

로렌초는 초상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는 포를리 미술관에 있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초상》(라 다마 데이 젤소미니)이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로마냐 지역의 포를리와 이몰라의 영주이자 이후 체자레 보르자의 포로였다. 이 초상화는 작품 속 인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506년경에 완성한 《모나리자》와 닮았다는 이유로 최근 큰 관심을 받았다. 또 다른 초상화는 그의 형수로 추정되는 인물의 초상화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의 구도는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의 다 빈치의 《지네브라 데 벤치》와 자주 비교된다.[7]
그의 후원자 중 몇몇은 사보나롤라와 연관이 있었으며, 초상화를 제외한 그의 작품에서 신화 등의 세속적 주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외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린 거의 누드에 가까운 비너스 작품이 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가 1504년에 완성한 《다비드》를 어디에 설치할지 결정하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8]
조르조 바사리는 자신의 저서 《미술가 열전》에서 로렌초 디 크레디의 전기를 남겼다. 바사리는 로렌초의 세련된 마무리를 칭찬했지만,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이며 안료를 너무 곱게 갈아 시간이 많이 든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로렌초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제자는 조반니 안토니오 솔리아니(1492~1544)로, 로렌초의 후기 작품 다수에서 보조 역할을 했다. 그 밖에도 토마소 디 스테파노 루네티, 안토니오 델 체라이올로 등이 있다.
로렌초는 1537년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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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로렌초는 종종 조각가로도 묘사되는데, 아버지의 직업과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조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각 훈련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주로 회화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선 조각 작업도 계속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
베로키오가 1488년에 사망했을 당시, 그의 작업장은 베네치아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 제작이라는 대규모 의뢰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베로키오는 유언에서 베네치아 당국에 로렌초를 추천했으나, 조각상은 당시 점토 상태로만 존재했고 주조는 시작되지 않았다. 로렌초는 자신의 권리를 다른 예술가, 즉 ‘청동 기술자’에게 넘겼으며, 작품은 이후 베네치아의 청동 조각가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가 완성했다.[10]
작품
- 《성모와 아기》, 1475년경, 스트라스부르 미술관
- 석류와 성모자, 1475~1480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아기에게 경배하는 성모와 어린 세례자 요한》, 1485년경,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
- 《아기에게 경배하는 성모와 어린 세례자 요한》, 1485년경,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미술관
- 《경배》, 1487년경, 세르비아 국립박물관
- 《성 프란체스코의 성흔》, 1490년경, 아작시오 페슈 미술관
- 《젊은 여성의 초상》, 1490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각주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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