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쟁
14~15세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군사적 분쟁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백년 전쟁(영어: the Hundred Years' War, 프랑스어: la guerre de Cent Ans)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이라는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플랜태저넷 가와 발루아 가 양측 모두 여러 동맹자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7년에 걸쳐 싸운 장대한 전쟁이다. 기사의 최고 전성기이자 동시에 기사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고한 국민정체성이 싹트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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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땅에 보유한 영지에 대하여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제후였다. 프랑스의 역대 국왕들은 수 백년에 걸쳐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를 빼앗아 왔으며, 백년전쟁 당시 즈음에는 잉글랜드 국왕이 실효지배하던 땅은 가스코뉴 정도밖에 없었다. 프랑스 입장에서 이 땅을 흡수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축출하려 시도하는 것은 곧 잉글랜드의 국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동맹국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일 때면 언제나 그 시도를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카페 본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와 숙질관계였다. 1316년 프랑스에 살리카법이 도입되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 금지되었다. 1328년 샤를 4세가 죽자 여성으로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된 이사벨라는 대신 자기 아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왕위계승권을 그 아들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근거로 그 주장을 무시했다. 이후 9년간(1328년-1337년) 잉글랜드 왕가는 카페 가의 방계인 발루아 가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러나 발루아 가의 초대 왕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며 전쟁에서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이 동원할 수 있는 국력 자체가 잉글랜드를 능가했기에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1429년부터 반격을 시작해 오를레앙, 파타이, 포흐미늬, 카스티용에서 결정적 승리들을 거두면서 전쟁은 프랑스의 우세로 끝났고 잉글랜드 왕가는 유럽 대륙의 영지 대부분을 영구히 상실했다.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중간중간의 휴전들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337년-1360년은 에드워드 전쟁, 1369년-1389년은 캐롤라인 전쟁, 1415년-1453년은 랭커스터 전쟁이라고 한다. 백년전쟁과 동시기에 진행된 주변 지역의 전쟁으로는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1341년-1364년), 카스티야 내전(1366년-1369년), 아라곤의 두 페드로의 전쟁(1356년–1375년), 포르투갈의 1383년-1385년 위기가 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이라는 용어를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일어난 이 모든 전쟁들을 포괄하는 시대명으로 사용하며, 이에 따르면 백년전쟁은 유럽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군사 분쟁이 된다.
백년전쟁은 여러 가지 요소에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백년전쟁 말기가 되면 상비군이 봉건군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전쟁에서의 귀족들의 역할도 대중 중심의 군대의 인력과 무기력으로 대체되었다. 전쟁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왕가들 사이의 분쟁이었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민들에게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중기병 중심의 봉건군이 대체되면서 새로운 무기와 전술들이 도입되었고, 특히 포병이 중요해졌다. 백년전쟁은 서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서유럽 세계에 상비군 개념의 부활을 촉발시켰다.[1] 한편 전쟁 당사국인 양국의 사정을 보자면 우선 프랑스에서는 내전과 역병, 기근, 그리고 산적떼에 가까운 자유중대 용병들의 준동 등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인 것에 비해 전쟁의 성과가 시원치 않고 오히려 대륙 영지들을 영구히 상실하게 되자 귀족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어 장미전쟁(1455년-1487년)이라는 내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