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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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三國時代)는 후한이 멸망한 3세기 초부터 서로 다투던 위, 촉, 오를 서진이 통일한 3세기 후반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사전적인 의미로는 위가 세워진 220년부터 오가 진에게 멸망한 280년까지를 삼국시대로 본다. 하지만 후한의 통치력은 이미 훨씬 전 황건의 난을 계기로 이미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황건의 난과 그 이후 펼쳐진 군웅할거의 시대 역시 삼국지대의 전초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대중들에게도 오히려 삼국 정립 이후보다 후한 말의 군웅할거 시대가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다른 국가들과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이 시대의 삼국들을 각각 위는 조위, 촉은 촉한, 오는 동오 또는 손오라고 부르곤 한다.
다만 동탁이 사망한 직후에는 후한이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잠깐 찾아왔었다. 하지만 탐욕에 절어있고 악에 받쳐있는 가후가 야반도주 하려던 이각과 곽사를 꼬득여 후한 헌제의 군대와 맞서 싸우게 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이각과 곽사군이 승리함으로서 후한은 완벽한 재기불능 상태로 전락했으며 결국 이게 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비록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력을 끼친 시대다. 삼국 시대는 후대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었고, 오늘날까지도 TV, 영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2차 창작물로 끝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명나라의 나관중이 쓴 삼국시대에 기반을 둔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다. 삼국지 연의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오늘날까지도 한자 문명권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읽혀지고 있다.
창작물이 아닌 권위있는 정통 역사 기록으로는 진수가 쓰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삼국지가 있다. 이 밖에도 후한서, 산양공일기, 영웅기 및 조만전 등이 당대의 시대상을 해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양한 관점의 당대 기록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아무래도 하나의 강력한 단일정부가 중국을 통치했던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기록 측면에서는 각각 다양한 관점의 다채로운 해석들이 풍부하게 남은 시대였다.
삼국 시대는 중국 역사 상 가장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였다. 후한 말 인구조사에 집계된 중국의 전체 인구는 약 5,000만명 정도였으나 중국을 재통일한 서진이 전국 규모로 다시 실시한 인구조사로 파악된 인구는 약 1,600만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단 이것은 10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3,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증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정국이 혼란스럽다 보니 많은 인구가 재산을 버리고 도적이나 유랑민이 되었고 혹은 지방 유지들에게 신변을 바치고 농노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의 상당 부분이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벗어났던 것이다. 물론 백만이 넘는 사상자를 야기한 이각 곽사의 난처럼 조직적인 대학살도 빈번하게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중국 전역이 전쟁터로 전락하면서 생산력이 급감하고 행정력 역시 마비되었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삼국정립의 시점을 기준으로 당대 중국의 인구는 약 3,000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