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마르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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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마르텔루스(라틴어: Carolus Martellus, 독일어: Karl Martell 카를 마르텔[*], 프랑스어: Charles Martel 샤를 마르텔[*], 영어: Charles Martel 찰스 마텔[*], 스페인어: Carlos Martel 카를로스 마리텔[*], 680년[1] 8월 23일 – 741년 10월 22일)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자 정치, 군사 지도자로, 718년 이후 프랑크 왕국의 동쪽 지방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했으며 프랑크 공작이자 프린스의 호칭을 획득하였다. 사라센의 침략을 격퇴하여 신망을 얻었으며, 로마 교회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이 컸던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의 왕위를 승인하게 된다. 그의 게르만족 정벌은 프랑크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의 왕 카를 대제의 영토 확장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별칭 마리텔은 "망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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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마르텔루스 Carolus Martell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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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인의 왕 권한대행 | |
재위 | 737년–741년 |
전임 | 테우데리쿠스 4세 |
후임 | 킬데리쿠스 3세 |
프랑크인의 공작 | |
재위 | 718년–741년 |
대관식 | 718년 |
전임 | 피피누스 2세 |
후임 |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
네우스트리아 궁재 | |
재위 | 718년–741년 |
대관식 | 718년 |
전임 | 라겐프리두스 |
후임 |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 |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 |
재위 | 715년–741년 |
대관식 | 715년 |
전임 | 테오도알두스 |
후임 | 카를로마누스 |
이름 | |
별호 | 망치 (라틴어: Martellus 마르텔루스[*] |
신상정보 | |
출생일 | 688년경 |
출생지 | 오늘날의 에르스탈 |
사망일 | 741년 10월 22일 |
왕조 | 카롤루스조 |
부친 | 피피누스 2세 |
모친 | 알파이다 |
종교 | 천주교 |
묘소 | 생드니 대성전 |
714년 아버지 피핀 2세가 죽은 뒤, 궁재직 계승권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뒤 717년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의 궁재직을 차지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석권한 뒤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외부 원정으로는 바이에른과 알레마니아를 공략하여 프랑크 왕국의 영향권 하에 두었고, 아키텐을 속국화하였으며, 프리지아로까지 진출했다. 작센족과의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 제국의 이슬람 군대와 베르베르인 군대를 크게 격퇴하였다. 737년부터는 공석이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자신을 도운 이복 형제 힐데브란트를 비롯한 부하 관료들에게 공작, 백작, 기사 등의 칭호를 부여해주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봉건 제도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은 카를로만 1세와 피핀 3세가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을 축출하지 않고 프랑크의 왕자이자 공작(Duke and Prince of the Franks)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했다. 737년부터는 궐석인 국왕의 직무를 대신하였다.
732년~737년의 이슬람 군대와의 전쟁에서 투르푸아티에에서 이슬람 군대를 최종 격퇴하여, 이슬람 군사를 알프스산맥과 피레네를 넘지 못하게 했다. 종교적으로는 성 보니파시오의 보호자이자 후견자였으며, 교황청은 한때 그에게 왕관을 제의하였지만 거절하였다. 732년 이슬람 교도와 치른 투르 전투 때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교회의 땅을 징발하여 나누어줌으로서 교회와 서로 틈이 생겼다.[2] 그는 군사물자 및 식량 조달과 가신들에게 봉토 제공 등 목적으로 교회, 수도원, 수녀원의 토지와 재산을 수시로 압수하여 군비와 봉토로 조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