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드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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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비가(폴란드어: Jadwiga, 헝가리어: Hedvig 헤드비그[*]; 1373/4 – 1399년 7월 17일)는 폴란드 왕국의 첫 여왕으로, 1384년 10월 16일부터 1399년 7월 17일까지 폴란드를 다스렸다. 야드비가는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의 왕이었던 러요시 1세와 왕후 코트로마니치 에르제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야드비가는 카페-앙주가의 일원이었지만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에 더 많은 조상을 두고 있었다. 1997년 로마 가톨릭교회는 야드비가를 시성했다.
야드비가 Jadwig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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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 바차렐리가 그린 야드비가의 초상화 | |
폴란드 여왕 | |
재위 | 1384년 10월 16일 ~ 1399년 7월 17일 |
대관식 | 1384년 10월 16일 폴란드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
전임 | 러요시 1세 |
후임 | 브와디스와프 2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73년 10월 3일 또는 1374년 2월 18일 |
출생지 | 헝가리 왕국 부더 |
사망일 | 1399년 7월 17일 |
사망지 | 폴란드 크라쿠프 |
왕조 | 카페 왕조 |
가문 | 카페 앙주가 > 앙주나폴리가 > 앙주헝가리가 |
부친 | 러요시 1세 |
모친 | 코트로마니치 에르제베트 |
배우자 | 브와디스와프 2세 |
종교 | 로마 가톨릭 교회 |
묘소 | 폴란드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
야드비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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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여왕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시복 | 1979년 5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시성 | 1997년 6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축일 | 6월 8일 |
1375년 야드비가는 빌헬름 폰 외스터라이히와 결혼하기로 계획되었고, 1378년부터 1380년까지 야드비가는 비엔나에서 살았다. 1379년 야드비가의 맏언니였던 엉주 커털린(헝가리어판)이 사망하면서, 야드비가의 아버지였던 러요시 1세는 야드비가와 빌헬름이 헝가리의 적합한 왕위계승자라고 여겼다. 같은 해 폴란드의 귀족들은 러요시의 둘째 딸인 마리어와 마리어의 약혼자인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약속했다. 하지만 러요시가 죽은 후 야드비가의 어머니인 에르제베트의 요구에 따라 마리어가 헝가리의 여왕이 되었다.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의 왕이 되려고 했으나, 폴란드 귀족들은 러요시의 딸이 폴란드에 거주할 때만 딸에게 복종할 것이라며 지기스문트에게 반발했다. 에르제베트는 이에 따라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통치자로 선택했으나, 대관식을 치르는 곳인 크라쿠프에 야드비가를 보내지 않았다. 지도자의 부재 동안 시에모비트 4세가 폴란드 왕위 후보자가 되었다. 비엘코폴스카의 귀족들은 시에모비트를 지지하고, 그와 야드비가의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마워폴스카의 귀족들은 시에모비트를 반대하며 에르제베트에게 야드비가를 폴란드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야드비가는 1384년 10월 16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왕위 대관식을 했다. 야드비가의 대관식은 야드비가의 약혼자 빌헬름이 협의 없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한 폴란드 귀족의 반대 의사를 반영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단지 여왕이라는 그녀의 지위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에르제베트의 우려로 야드비가의 고문관들은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던 요가일라와 협상을 열어두었다. 요가일라는 여전히 이교를 믿고 있었고, 이는 야드비가와의 잠재적인 결혼 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요가일라는 크레보 합병에 서명했는데, 자기 자신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과 미신을 믿는 국민들의 개종을 약속한 것도 내용에 담겨 있었다. 한편, 빌헬름은 크라쿠프로 서둘러 가서 어릴 적 약혼자였던 야드비가와 결혼하기를 희망했으나 1385년 8월 폴란드 귀족은 빌헬름을 내쫓았다. 요가일라는 세례명 브와디스와프를 이름으로 받아들였고, 1386년 2월 15일 야드비가와 결혼했다. 요가일라는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1386년 3월 4일 폴란드 왕에 즉위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반군들이 야드비가의 어머니와 언니를 감금하자, 야드비가는 헝가리 통치 하에 있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을 공격해 대부분의 지역민들을 폴란드 왕국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야드비가는 야기에우워와 다툼이 있던 친족들 사이를 중재하고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의 분쟁도 중재했다. 1395년 언니 마리어가 죽자 야드비가와 야기에우워는 부인을 잃은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헝가리의 상속권을 요구했으나, 헝가리 귀족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야드비가는 1399년 아기를 출산한 후 곧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