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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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라틴어: Carolus III Crasus, 프랑스어: Charles III le Gros, 독일어: Karl der Dicke, 839년 6월 13일 – 888년 1월 13일)는 카롤루스 왕조의 군주 중 하나다. "크라수스"란 "비만하다"라는 뜻이다. "카롤루스 비만왕"이라고도 한다.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Carolus III Cras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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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바라크의 독일 황제록의 카롤루스 크라수스. | |
인장 | |
로마인의 황제 | |
재위 | 881년 2월 12일-887년 11월 11일 |
대관식 | 881년 2월 12일 |
전임 | 카롤루스 2세 칼부스 |
후임 | 구이도 3세 스폴레텐시스 |
서프랑크인의 왕 | |
아키텐왕 | |
재위 | 884년 12월 6일-887년 11월 11일 |
대관식 | 885년 5월 20일 |
전임 | 카를로마누스 2세 |
후임 | 오도 1세 (서프랑크) 라눌푸스 2세 (아키텐) |
이탈리아왕 | |
재위 | 880년 3월 22일-887년 11월 11일 |
대관식 | 880년 4월 12일 |
전임 | 카를로마누스 |
후임 | 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 |
동프랑크인의 왕 | |
알레만니왕 | |
재위 | 876년 8월 28일-887년 11월 11일 |
전임 |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
후임 | 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
이름 | |
별호 | 비만왕 |
신상정보 | |
출생일 | 839년 6월 13일 |
사망일 | 888년 1월 13일 |
왕조 | 카롤루스조 |
부친 |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
모친 | 바이에른 사람 헤마 |
배우자 | 슈바벤 사람 리크가르디스 |
종교 | 천주교 |
동프랑크인의 왕, 이탈리아왕이었고 881년에는 교황 요한 3세에게 축성을 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864년 슈바벤 공작, 라이티아 백작, 865년 알레만니아 분국의 분봉왕을 거쳐 876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알레만니아의 왕이 되었다. 879년 병석에 누운 형 카를만에게서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위임받고, 880년 이탈리아를 상속받았다. 882년부터는 소루트비히의 죽음으로 바이에른, 프랑켄, 작센을 차지했고, 884년에는 서프랑크의 왕이 되어 카를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일원으로 독일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그의 퇴위와 죽음을 기점으로 카롤링거 왕조 체제는 붕괴되었다.
880년 맏형 카를로만 3세에게서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을 물려받았고, 882년 형 루트비히 청년에게서는 작센과 슈바벤을 물려받아 동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하였다. 그 뒤 884년 서프랑크 왕 샤를로망 2세가 요절하였으나 성인이 된 후계자가 없어 카를이 서프랑크 국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베르덩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위 기간 중 886년부터 887년 노르만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다.
간질과 뇌졸중 등의 질병으로 제대로 정무를 주관할 수 없었다. 서자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던 카를은 887년 그는 자신의 황후 슈바벤의 리첼다가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폐출시키려 했지만, 그의 정치고문 베르첼리의 주교 리우트바드의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샤를마뉴의 사후 일시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여 유럽 전지역을 재통일하였으나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두 차례의 바이킹의 약탈을 막아내지 못했다. 886년에는 파리를 점령한 바이킹을 뇌물로 매수,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가 발각, 조카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폐위되었으며 빈곤과 병마로 비참하게 사망했다. 이후 제후들의 반란으로 왕조는 해체되었다. 서프랑크의 통치자로도 재위했지만 보통 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간주되지는 않아 서프랑크의 왕계표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간질을 앓았으며 비만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