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황제 문제
유럽에서 로마의 황제에 대한 논쟁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두 황제 문제(독일어: Zweikaiserproblem,[lower-alpha 1] 그리스어: πρόβλημα δύο αυτοκρατόρων)는 어떤 진정한 황제가 단 한 명뿐이라는 보편 제국의 개념 사이와 종종 두 명(때로는 그 이상)의 사람이 동시에 직위를 주장했다는 사실의 역사적 모순에 대한 역사학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는 주로 중세 유럽과 관련하여 사용되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황제와 현대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신성 로마 황제 사이에 어떤 황제가 합법적인 로마 황제를 계승하는지에 대한 오랜 논쟁에서 사용된다.
중세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로마 제국은 나누어질 수 없는 국가였고,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경 안에 살지 않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로마 제국 황제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갖고 있었다. 고대 후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동방에 남아 있는 지역들을 대표함)은 그 자체로, 교황과 유럽 전역의 새로운 기독교 왕국의 합법적인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이것은 797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눈이 먼 뒤 폐위되고 그의 어머니인 이리니 황후가 통치를 할 때까지 유지되었는데, 이리니 황후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그녀가 여성으로서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 3세는 이리니를 인정하지 않고 800년 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를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의 개념으로 로마 황제로 선언했다.
두 제국은 결국 서로의 통치자를 황제로 인정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신성 로마 황제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나중에는 '독일인의 황제'로 언급하기 시작했고, 이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비잔티움의 황제를 종종 '그리스인의 황제' 또는 '콘스탄티노폴의 황제'로 언급했으며, 이후에는 서로를 '로마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카롤루스의 대관식 이후 수 세기 동안 황실 칭호에 관한 분쟁은 신성 로마 제국-비잔티움 관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한 군사적 행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러한 분쟁은 두 제국 간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 두 제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제국 사이의 지리적인 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비잔티움과 거리가 가까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의 주변 국가들은 종종 제국의 칭호를 주장하며 비잔티움과의 군사적인 대립을 일으키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1204년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전복되고 라틴 제국이 제국을 대체한 이후, 두 황제 간의 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같은 종교 지도자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은 지속되었다. 라틴 제국의 황제들은 신성 로마 황제를 합법적인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칭호 또한 주장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제국의 패권을 서(신성 로마 제국)와 동(비잔티움 제국)으로 나누는 제국 분할(divisio imperii)을 받아들였다. 라틴 제국은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의해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멸망했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1204년 이전의 비잔티움 제국의 권력만큼을 갖지 못했고, 이후의 황제들은 그 문제를 무시하고 서쪽의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제국의 많은 적들에 대한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황제 문제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에야 다시 나타났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황제의 Kayser-i Rûm(로마의 카이사르)를 주장하고 보편적인 패권을 갖기를 열망했다. 153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에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차례로 오스만 제국에게 황제로 인정되지 못했다. 1606년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즈시바토로크 조약에서 루돌프 2세를 황제로 인정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서방과의 분쟁을 끝내기 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kıral(왕)이라는 다른 칭호로 따로 불렀다. 오스만 제국 외에도 러시아 차르국과 후기 러시아 제국도 비잔티움 제국의 로마 유산을 주장했으며, 나중에 그들은 스스로를 차르('카이사르'에서 파생됨)로, 이후 로마 황제를 칭했다. 신성 로마 황제들은 1726년까지 러시아의 제국 칭호에 대한 주장을 거부했고, 카를 6세는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해 이를 인정했지만, 두 황제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