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1932–2021)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2021년 10월 26일[2][3])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제4공화국 당시 친구인 전두환과 하나회를 결성하여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하였다. 반란 성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고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제41대 내무부 장관직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교하이며 대구 출생이다.
노태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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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1989년) | |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 | |
임기 | 1988년 2월 25일~1993년 2월 24일 |
국무총리 | 이현재(1988년) 강영훈(1988년~1990년) 노재봉(1991년) 정원식(1991년~1992년) 현승종(1992년~1993년) |
전임: 전두환(제11·12대) 후임: 김영삼(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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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932년 12월 4일(1932-12-04)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
사망일 | 2021년 10월 26일(2021-10-26)(88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본관 | 교하(交河) |
학력 | 육사 11기 |
정당 | 무소속 |
부모 | 노병수(부), 김태향(모) |
배우자 | 김옥숙 |
자녀 | 노재헌, 노소영 |
종교 | 불교→천주교(세례명: 사도 요한) |
별명 | 호 용당(庸堂)[1] 자 관성(冠星) |
군사 경력 | |
1951년 육사생도 시절의 노태우 | |
복무 | 대한민국 |
복무기간 | 1955년 2월~1981년 7월 16일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최종계급 | 대장 |
지휘 | 육군 제9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육군 제9보병사단 사단장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
참전 | 베트남 전쟁 6.25 전쟁 |
전두환과 친구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 1955년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에 장성으로 진급한 그는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에 대장으로 예편한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고 6.29 민주화 선언 후, 대한민국의 대선에 36%의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물론 그의 대통령당선에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이 한몫했다.
198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치인 및 정치에 대한 풍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동구권, 소비에트 연방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1991년에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자치제 부활을 수용하여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1991년 남북한 UN 동시 가입 결정이 내려지자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이를 강행하였다.
1993년에 퇴임한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속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7년 12월 22일에 특별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올림픽을 준비하였고, 서울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체육을 좋아하여 육사생도 시절에는 육상부와 럭비부 팀원으로 활약했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3대 대선 당시 보통 사람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1994년 그가 정치 비자금을 챙긴 것이 당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당시 국회의원 박계동 등에 의해 연이어 폭로되면서 풍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