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 (독일 황제)
1888년 독일 황제 겸 프로이센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프리드리히 3세(독일어: Friedrich III 프리드리히 데어 드리테[*], 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는 독일 제국의 제2대 황제 겸 프로이센 왕국의 왕(Deutscher Kaiser und König von Preußen, 재위: 1888년 3월 9일 ~ 6월 15일)이다. 본명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콜라우스 카를 호엔촐레른 폰 프로이센(Friedrich Wilhelm Nikolaus Karl Hohenzollern von Preußen)이며 프리츠(Fritz)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었다.[1]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가풍에 따라 군인으로 자랐다. 1861년 아버지가 프로이센 왕에 즉위한 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군공을 세우고 그 지도력과 능력을 인정받았으나,[2][3] 전쟁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고, 그의 인도주의적 처사에 많은 우방과 적이 감탄하였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된 후, 다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1888년, 부황 빌헬름 1세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27년간 후계자 자리에 있던 프리드리히가 독일 제국 황제 겸 프로이센 왕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황태자 시절부터 후두암으로 투병중이었던 그는 결국 즉위 99일 만인 6월 15일에 56세를 일기로 급사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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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네 카이저리헤 운트 쾨니클리헤 마예슈테트 | |
독일 황제기 | |
독일 황제 | |
프로이센 국왕 | |
재위 | 1888년 3월 9일 ~ 1888년 6월 15일 |
전임 | 빌헬름 1세 |
후임 | 빌헬름 2세 |
수상 |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
총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후작 |
이름 | |
휘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콜라우스 카를 호엔촐레른 폰 프로이센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31년 10월 18일(1831-10-18)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사망일 | 1888년 6월 15일(1888-06-15)(56세) |
사망지 | 독일 제국 포츠담 신궁전 |
가문 | 호엔촐레른 가 |
부친 | 빌헬름 1세 |
모친 | 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녀 |
배우자 |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마리 루이즈 |
종교 | 루터교 |
묘소 | 포츠담 평화교회 |
군사 경력 | |
복무 | 프로이센 육군 |
최종계급 | 원수 |
주요 참전 |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 |
프리드리히 3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라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와 결혼하였다. 특히 부부는 자유주의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인민들이 보다 많은 의견을 정부에 대변하기를 원했다. 프리드리히는 비록 보수적인 군인적 가풍에서 자랐지만, 본 대학교에서의 학창시절과 부인으로부터 받은 영국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황태자로서 그는 수상의 권력을 제한하기를 주장했고 무력으로 독일을 통일하려는 정책을 핀 보수파 제국수상 오토 본 비스마르크와 자주 충돌했다. 독일과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프리드리히가 군주로서 독일 제국을 더 자유롭게 진보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프리드리히는 장인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아버지인 앨버트 공을 매우 존경하였다. 프리드리히 부부는 영국의 장인과 장모처럼 배우자 역시 나랏일에 함께 참여하기를 희망하였고, 비스마르크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놨던 행정부의 문제점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 직속의 제국수상실을 제국의회에서 선출된 각부 장관 중심의 영국식 내각으로 개편, 정부의 모든 정책은 내각의 총의에 따라 결정, 집행하게 되는 계획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제국헌법을 일러 교묘하고 부자연스러운 혼돈이라 정의했다.[4]
“ |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진보주의 세력을 지지하였고, 70대에 접어든 비스마르크는 늙은 황제가 언제 죽을지, 그리고 자신을 몰아내고 진보 세력의 지도자가 제국수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비스마르크는 황태자의 행보를 경계하여 그의 행동을 제약해 더 이상의 다른 영향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기마저도 떨어뜨렸다.[5] | ” |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병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진보적인 정책은 이후 그의 아들 빌헬름 2세에 의해 폐기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정확한 서거 시각과 그의 즉위 기간은 여러 역사가들의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프리드리히가 즉위했던 기간은 독일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6] 이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독일이 자유주의적으로 변모했을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역대 독일 군주 순서대로 보면 프리드리히 4세가 되어야 하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렌 왕가의 반발을 의식, 프로이센을 계승하는 프리드리히 3세 칭호를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