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1881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1881–192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박용만(朴容萬, 1881년 8월 26일(음력 윤7월 2일)[1] ~ 1928년 10월 16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 한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언론인이다.
간략 정보 박용만朴容萬, 임기 ...
박용만 朴容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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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의 박용만 | |
前 한성임시정부 외무총장 (前 漢城臨時政府 外務總長) | |
임기 | 1919년 4월 23일 ~ 1919년 9월 11일 |
대통령 | 이승만 |
총리 | 이동휘 |
이름 | |
별명 | 호(號)는 우성(又醒)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1년 8월 26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궁전리 |
거주지 | 조선 강원도 춘천 대한제국 한성부 미국 네브래스카주 네브래스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 |
사망일 | 1928년 10월 17일(1928-10-17)(47세) |
사망지 |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에서 암살(총격에 의해 사망)됨. |
학력 | 일본 도쿄 게이오 중학교 미국 링컨 고등학교 미국 네브래스카 대학교 링컨 정치학과 미국 헤이스팅스 칼리지 군사학과 |
경력 | 한국독립당 군사행정위원 언론인, 사회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출신 |
정당 | 한국독립당 |
부모 | 박선병(부), 경주 김씨 부인(모) |
배우자 | 김해 김씨 부인(초취) 웅소청(계취) 천출 중국 여성(첩) |
자녀 | 딸 박동옥, 아들 박광원 |
친인척 | 사위 이용화, 외손녀 이영희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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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7년) 보안회의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 이승만(李承晩)을 옥중에서 만나 의기투합, 옥중 동지가 되었다. 한성감옥에서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과 정순만이 함께 있어 이들이 의형제를 맺어 '3만'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세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는데, 박용만은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Kearney) 농장에서 무장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대조선 국민군단을 설립해 지도하는 등 무장 투쟁 운동을 벌였다.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과 함께 재미국 한인 교민 사회의 초기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이승만의 사상적 동지였으며, 이승만을 하와이에 정착시켰다. 그러나 1914년 독립운동 방법의 차이로 이승만과 갈등을 겪다 정적으로 변신한다. 1928년 군자금 모금차 중국 텐진에 체류하던 중 독립운동 자금에 쓸 돈 1천원을 내놓으라는 의열단원 이구연, 박인식, 이규서 등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암살당한다. 호는 우성(又醒)이며, 강원도 철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