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
중국의 정치가, 의사, 혁명가 (1866~192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쑨얏센(孫逸仙) 또는 쑨원(중국어 정체자: 孫文, 간체자: 孙文, 병음: Sūn Wén, 한자음: 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의 창립자이다. 호(號)는 이셴(중국어: 逸仙, 병음: Yìxiān, 한자음: 일선, 광둥어: Jat6 Sin1 얏신[1]), 본명(本名)은 더밍(중국어: 德明, 병음: Démíng, 한자음: 덕명), 별명은 중산(중국어: 中山, 병음: Zhōngshān, 한자음: 중산) 또는 나카야마(일본어: 中山)이다.
쑨원 孫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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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의 채색 초상화 | |
중화민국의 육해군대원수 | |
임기 | 1923년 2월 21일-1925년 3월 12일 |
전임 | 쑨원 (비상대총통) |
후임 | 호한민 (대리) |
중화민국의 비상대총통 | |
임기 | 1921년 5월 5일-1923년 2월 21일 |
전임 | 쑨원 (육해군대원수) |
후임 | 쑨원 (육해군대원수) |
중화민국 호법군정부의 육해군대원수 | |
임기 | 1920년 11월 28일-1921년 5월 5일 |
전임 | 육진동 (주석총재) |
후임 | 손일선 (비상대총통) |
임기 | 1917년 9월 10일-1918년 5월 20일 |
전임 | (신설) |
후임 | 잠춘훤 (주석총재) |
중화민국의 제1대 임시대총통 | |
임기 | 1912년 1월 1일-1912년 3월 10일 |
전임 | (신설) |
후임 | 위안스카이 |
부통령 | 임시부총통 리위안훙 |
총리 | 국무총리 탕사오이 |
틀:나라자료 중국국민당의 당총리 | |
임기 | 1919년 10월 10일-1925년 3월 12일 |
전임 | 쑨원 (중화혁명당총리) |
후임 | 장정강 (중앙집행위 주석) |
틀:나라자료 중국국민당 중화혁명당의 당총리 | |
임기 | 1914년 7월 8일-1919년 10월 10일 |
전임 | 쑨원 (국민당이사장) |
후임 | 쑨원 (중국국민당총리) |
국민당의 이사장 | |
임기 | 1912년 8월 25일-1914년 7월 8일 |
전임 |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
후임 | 쑨원 (중화혁명당 총리) |
틀:나라자료 중국국민당 중국 동맹회의 총리 | |
임기 | 1905년 8월 20일-1912년 8월 25일 |
전임 | 쑨원 (흥중회 회장) |
후임 | 쑨원 (국민당 이사장) |
틀:나라자료 중국국민당 흥중회의 회장 | |
임기 | 1900년 1월 24일-1905년 8월 20일 |
전임 | 양구운 |
후임 | 쑨원 (중국 동맹회 총리) |
이름 | |
별명 | 휘: 문 (중국어: 文, 병음: Wén 원[*]) 아명: 제상 (중국어: 帝象, 병음: dìxiàng 디샹[*])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66년 11월 12일(1866-11-12) (음력: 동치 5년 10월 6일) |
출생지 |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 취형촌 |
사망일 | 1925년 3월 12일(1925-03-12)(58세) |
사망지 | 중화민국 징자오 지방 협화병원 |
학력 | 홍콩 화인서의서원 (현 홍콩대학) |
정당 | 흥중회 → 중국 동맹회 → 국민당 → 중화혁명당 → 중국국민당 |
본관 | 광동성 동완현 |
배우자 | 원처 노모정 (1884년-1915년) 계처 대월훈 (1903년-1906년) |
자녀 | 적자 1남 2녀:
서자 1녀: |
종교 | 회중교 |
쑨중산(孫中山)·쑨이셴(孫逸仙)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청나라 광둥성 샹산 출신으로 홍콩에서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혁명에 뜻을 품고 1894년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광저우에서 최초로 거병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망명하면서 삼민주의를 착상, 이를 제창했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 화교들을 중심으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2]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킴으로써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와 타협, 같은 해 3월 1일 위안스카이에게 실권을 위임하였고 급기야는 같은 해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같은 해 '제2혁명'에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이듬해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여 반원(反袁)운동을 계속했다.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국민당을 결성했다.[2]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2] 이어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 당시 경도특별시에서 병사했다. 쑨원의 묘는 난징에 있다. 오늘날 중화민국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 다음가는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를 인정받아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