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일번지
1980~90년대 KBS 2TV에서 코미디 프로그램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유머 1번지》는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채널 KBS 2TV에서 1983년 4월 2일부터 1992년 10월 4일까지 주말 저녁에 방송된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유머 1번지 | |
장르 | 코미디 |
---|---|
방송 국가 | 대한민국 |
방송 채널 | KBS 2TV |
방송 기간 | 1983년 4월 2일 ~ 1992년 10월 4일 |
방송 횟수 | 478부작 |
추가 채널 | KBS 스토리 |
연출 | 안인기, 이상훈, 김웅래 外 |
각본 | 장덕균 外 |
초기에는 단편 코미디 프로들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는 고정 코너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임하룡, 심형래, 김형곤 등 다수의 코미디언이 출연하였고, 김웅래 PD하고 박문영 작곡가가 참여하였다.
한편, 최양락, 이봉원, 김학래, 임미숙, 김종국, 최형만 등 대다수 코미디언들이 1991년 12월 9일 당시 새로 개국한 SBS로 이적한 뒤(참고로 SBS가 개국하는 과정에서 1991년 10월 13일 방송분부터 배꼽이 가렵다고 긁지 말아라, 포졸, 청원 경찰 학교, 사랑의 삼중주, 구두를 닦으세요 등 1회용 코너가 한달 정도 이어진 끝에 1991년 11월 10일 진중일기와 팡파르를 울려라 시작 이후 안정을 되찾다가 진중일기 종영 이후 1992년 1월 5일 방송분부터 내사랑 내곁에, 두 사나이(어느 절도범의 탈출기)등 1회용 코너가 2주 정도 지속한 끝에 1992년 1월 19일 방송분부터 안정을 되찾았다)[1]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자 1992년 10월 4일 방송분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며 부녀자 인신매매 내용을 지나치게 흥미위주로 다뤄[2] 말썽을 빚었다.
아울러, 김미화가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제 18회 한국방송대상 여자 코미디언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3] 1달 뒤인 1991년 10월 SBS와 1년 전속계약을 맺고 이적했으나 건강사정 때문에 그 해 11월 초부터 모든 활동을 잠정 중단했으며[4] 199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와 더불어, 해당 프로그램 후속으로 <웃음 한마당>이 신설됐는데[5] 미리 기획한 코너에서 이창훈 등이 출연을 거부하여 차질을 빚어왔으며 당초 토크쇼 위주 코미디였으나 초대 연출자 김웅래 PD가 공채 7기 겸 대학개그제 1기 출신의 신인 코미디언들만을 기용하자 '찬밥' 신세가 된 일부 중견 코미디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992년 11월 29일부터 김웅래 PD에서 유찬욱 PD로 연출자가 바뀐 동시에 콩트 형식으로[6] 포맷을 변경시킨 한편 한편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 출연 - 3개월 이상 출연을 거부한 장두석 복귀 - 50여명 이상의 소속 코미디언 전원을 동원시키는 소강수를 뒀다.
하지만, <웃음 한마당>은 포맷 변경 후 정통 코미디 코너를 고수하여[7] 전작인 해당 프로그램(유머 1번지)과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으며 1993년 봄 개편으로 막을 내렸는데 <웃음 한마당>의 포맷과 연출자 변경 과정에서 스탠딩 개그 및 토크 개그를 통해 1인 코미디극을 선보여 온 한편 '감자골 4인방'으로 불린 동시에 1991년 5월 KBS 공채 7기 겸 대학개그제 1기로 데뷔한 김용만 김국진 박수홍 김수용 이들 네 사람이 일부 선배 코미디언들로부터 '강요성' 배역 요구에 불만을 품고 활동 중단을 공식 발표했으며(1993년 1월 10일)[8] 이들은 은퇴선언 1달 뒤인 1993년 2월 11일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만나봅시다' 코너(방송일은 2월 14일)[9] 녹화를 했다.
그러나, KBS 코미디언 50여 명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녹화장으로 쳐들어가 한동안 녹화가 중단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10] '감자골 4인방'은 1993년 2월 20일 KBS 코미디언실 운영위원회로부터 "KBS 전체 프로그램 6개월 출연정지" 중징계를 받은 데다 KBS 뿐 아니라 MBC SBS 모든 채널 출연금지 징계를 받아야 했으며 1993년 6월 25일 미국행(김국진 김용만) 군 입대(박수홍)를 하는 등 모든 활동을 잠정 중단했고 이를 "감자골 사건"이라 하며 이 사건 때문에 MBC도 더 큰 피해를 봐야 했는데 1989년 제 3기[11] 이후 TV 개그맨 콘테스트를 선발하지 않아 쓸만한 신인 발굴에 어려움을 겪어온 데다 SBS 개국 뒤 정재환 박미선 등 핵심 개그맨들의 공백까지 겹쳐 말 그대로 "설상가상" 신세가 되자 '감자골 사건' 2달 후인 1993년 4월 제4기로[12] TV 개그맨 콘테스트를 재개했다.
한편, '감자골 4인방'은 "감자골 사건" 이후 <웃음한마당> 진행자[13] 故 김형곤, "감자골 사건" 당시 KBS 희극인 실장이었던[14] 故 최용순 등 KBS 중견 개그맨들과 사이가 틀어졌고 1990년 6월 KBS 공채 6기 개그맨으로 데뷔했으나 1991년 12월 초 김형곤과의 폭행 사건[15] 이후 슬럼프를 겪어 1992년 3월 SBS로 이적했지만 대우-배역 비중 문제 때문에 제작진과 잦은 마찰을 빚어온 것 외에도 신동엽 (특채)[16] 김경식 (공채 1기)[17] 등 SBS에서 키운 신인 개그맨들에게 밀려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한 서인석이 "감자골 사건" 3달 뒤인 1993년 5월 KBS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김형곤은 서인석 폭행 사건 뿐 아니라[18] 건강 문제 때문에 1992년 1월 초부터 한동안 코미디 프로그램 출연을[19] 중단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자골 사건" 이후 본인(김국진) 등 '감자골 4인방'이 KBS 중견 개그맨들과 사이가 틀어진 과정에서 '감자골 4인방'의 맏형이었던 김국진이 김형곤 돌연사(2006년 3월 11일)[20] 당시 빈소에 오지 않았고 김국진 외에도 2002년 7월 11일 모 신문에 김형곤이 회장으로 재직한 다이어트 킴에서 광고를 하며 무단으로 본인(심현섭)의 얼굴을 싣자 본인(심현섭)의 소속사 스타벨리가 같은 달 12일 서울지법 동부지원에[21] 김형곤을 상대로 초상권 침해와 사기 혐의로 소장을 접수하여 한때 김형곤과 사이가 안 좋아진 심현섭, 김형곤 돌연사 당시[22][23]빈소에 온 윤정수(1기) 홍록기 (2기) - 김형곤 돌연사 다음 날 빈소를 방문한[24] 김구라 (본명 김현동)(2기) 이외의 SBS 공채 1~2기 개그맨들이 김형곤 돌연사 당시 빈소에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