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 (1630–168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1])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군주이다. 1649년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잉글랜드 의회의 재판에 의해 처형 된 뒤 왕위 계승을 선언하였으나 공화제를 선포한 잉글랜드 연방이 운영되는 동안 망명 생활을 하여야 하였고 1660년 왕정복고 이후에야 실질적인 군주로서 재위할 수 있었다.
찰스 2세
Charles 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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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스코트인의 왕 | |
재위 | 1660년~1685년 |
전임 | 찰스 1세 |
후임 | 제임스 2세 |
신상정보 | |
가문 | 스튜어트가 |
부친 | 찰스 1세 |
모친 |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
배우자 | 브라간사의 캐서린 |
종교 | 잉글랜드 성공회→로마 가톨릭 |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 사이의 차남으로, 원래 위에 형이 한 명 있었지만 태어나고 하루 만에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둘째였던 그가 장남으로 올라가면서 1649년 1월 30일,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직후인 2월 5일 스코틀랜드 의회에 의해 잉글랜드 왕세자에서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는 호국경이 정부를 대표하는 공위시대를 이어갔기 때문에 당시 찰스 2세의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에 대한 군주 권한 선포는 상징적 주장에 불과하였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를 끝으로 잉글랜드 내전이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자 찰스 2세는 망명하여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서 생활하였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 이후 잉글랜드의 정치가 불안해지자 왕정복고 시도가 이루어졌고 1660년 5월 29일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실질적인 군주로서 재위하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모든 공문서는 공위시대를 부정하고 찰스 1세 사망 시점인 1649년 이후 찰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서술한다.
찰스 2세의 실질적 재위 이후 잉글랜드 내전기의 의회파를 지칭하는 원두당에 대립한 왕당파인 기사당이 의회를 장악하여 당시 소집된 의회를 기사 의회라 칭한다. 기사의회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다시 국교로 지정하고 비국교도를 억압하는 형벌법을 재정하였다. 찰스 2세는 개인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내전 기간 동안 함께 진행되었던 청교도와 성공회의 종교적 갈등을 감안하여 형벌법을 묵인하였다.
찰스 2세의 재위 초기 잉글랜드의 가장 큰 외교 현안은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었다.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 이후로도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이 극심한 상황이었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공식적으로 가톨릭에 맞선 개신교 동맹의 한 축이었으나 북해의 재해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찰스 2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마리는 프랑스의 왕녀였고 이러한 혈연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찰스 2세와 사촌지간이었다.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도버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찰스 2세는 프랑스의 지원에 대한 댓가로 가톨릭에 대한 관용 정책을 약속하였으나 이는 의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679년 의회에서 가톨릭교도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배척법이 발의되어 배척법 위기가 촉발되었다. 의원들은 배척법안데 대한 입장에 따라 이를 지지하는 휘그당과 반대하는 토리당으로 나뉘었고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여당과 야당이 나뉘는 정당 정치가 발달하였다. 찰스 2세는 은연중에 토리당을 지지하였다.
1683년 일부 휘그당원이 포함되어 국왕 시역을 계획한 라이 하우스 음모가 발각되자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였다. 해산된 의회는 찰스 2세가 사망할 때까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측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친근한 성품이었지만 정치적 사안에 대한 고집도 커서 그의 견해를 바꾸도록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찰스 2세의 궁정은 도덕적 문란으로 악평이 높았다.[1] 왕비인 포르투갈의 왕녀 카타리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찰스 2세는 여러 정부를 두어 스스로 자신의 사생아로 인정한 자녀만 12명에 달했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찰스 2세의 사망 후 왕위는 동생인 제임스 2세가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