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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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Traianus)는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이다. 원로원이 optimus princeps ("최고의 통치자")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바 있는, 트라야누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군사 활동을 이끌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를 이르게 끔하며 가장 성공적인 군인 황제로 여겨진다. 또한 대규모 공공 시설 사업을 주관하고 사회 복지 정책을 실행하며 박애주의 통치자로서도 알려져있으며, 이런 행보는 지중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이끈 오현제 중 두 번째 황제라는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게 해주었다.
트라야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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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로마 황제 | |
재위 | 98년 1월 27일–117년 8월 8일 |
전임 | 네르바 |
후임 | 하드리아누스 |
이름 | |
휘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
존호 | Imperator Caesar Nerva Traianus (97–98)[1] |
신상정보 | |
출생일 | 53년 9월 18일 |
출생지 |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이탈리카 |
사망일 | 117년 8월 8일 (63세) |
사망지 | 로마 제국 킬리키아 셀리누스 |
가문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부친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네르바 (계부) |
모친 | 마르키아 |
배우자 | 폼페이아 플로티나 |
자녀 | 하드리아누스 (양자) |
묘소 | 로마 (오늘날 소실된 트라야누스 원주의 아랫 부분) |
트라야누스는 오늘날 스페인의 세비야에 가까운 곳에 있던, 히스파니아 바이티카라는 로마 속주의 이탈리아족 정착지인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후기 작가들이 그를 속주민 출신이라 잘못 표기하기도 했으나, 트라야누스의 울피아 씨족은 움브리아 출신이고 그도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2]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명성을 얻었다.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레가투스 레기오니스로 복무하던, 89년에 트라야누스는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일으킨 라인강 지역 반란에서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했다. 96년 9월,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자녀가 없던 노년의 네르바가 이었으며, 그는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친위대 인원들이 주도한 반란으로 절정에 이른, 짧고 떠들썩한 권력 다툼 속에서 1년이 지나고, 네르바는 좀더 인기있던 트라야누스를 자신의 후계자이자 후임자라는 양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르바는 98년에 사망했고 문제 없이 그의 양자인 트라야누스가 그 뒤를 이었다.
공공 행정가로서, 트라야누스는 대규모 공공 시설 사업으로 유명하며, 로마시를 재설계하고, 트라야누스 포룸, 트라야누스 시장, 트라야누스 원주 등의 불후의 건축물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재위 초기에 나바테아 왕국을 병합하고,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를 만들었다. 그의 다키아 정복은 새롭게 정복한 속주가 뛰어난 가치의 금광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어, 제국을 크게 부유하게 해주었다. 트라야누스의 대 파르티아 제국 전쟁은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 약탈과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합병으로 끝이 났다. 그의 재위 때 벌여진 군사 원정은 로마 제국을 최대 영토로 늘려주었다.
117년 말에, 로마로 돌아가는 배를 타던 중, 트라야누스는 병에 걸려 셀리누스라는 도시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했고 그의 재는 트라야누스 원주 아래에 안치되었다. 그의 뒤는 추정상 트라야누스가 병상에서 양자로 받아들인 그의 조카 하드리아누스가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