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흑태자
웨일스와 아키텐의 공작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에드워드 흑태자(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1376년 6월 8일[1])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다. 옥스퍼드셔의 우드스톡 궁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드스톡의 에드워드(Edward of Woodstock)라고도 불린다. 1337년 콘월 공작, 1343년 웨일스 공의 작위를 받았고 1362년에서 1372년까지 아키텐 공작의 지위에 있었다.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Edward of Woodstoc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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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 공 | |
재위 | 1343년 5월 12일-1376년 6월 8일 |
대관식 | 1343년 5월 12일 |
전임 | 캐르나펀의 에드워드 |
후임 | 보르도의 리처드 |
군주 | 에드워드 3세 |
콘월 공작 | |
재위 | 1337년–1376년 |
전임 | (신설) |
후임 | 보르도의 리처드 |
군주 | 에드워드 3세 |
아키텐 친왕 | |
재위 | 1362년–1372년 |
전임 | 윈저의 에드워드 |
후임 | 윈저의 에드워드 |
군주 | 에드워드 3세 |
이름 | |
휘 | 우드스톡의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Edward Plantagenet of Woodstock) |
별호 | 흑태자 (영어: the Black Prince)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30년 6월 15일 |
출생지 | 옥스퍼드셔 우드스톡궁 |
사망일 | 1376년 6월 8일 |
사망지 | 런던 웨스트민스터 |
왕조 | 플랜태저넷 |
부친 | 에드워드 3세 |
모친 | 헤노의 필리파 |
배우자 | 켄트 백작부인 4세 조앤 |
자녀 | 앙굴렘의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왕 보르도의 리처드 2세 |
묘소 | 캔터베리 대성당 |
흑태자는 백년 전쟁기간 동안 가장 성공적인 승리를 거둔 잉글랜드 측 사령관으로 꼽힌다. 그는 기병 운용에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였으며 살아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기사로 칭송받았다.[2] 1346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며 승리하였고, 이후 백년 전쟁의 초기인 에드워드 전쟁 시기 장 2세를 생포한 푸아티에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한 뒤 에드워드 흑태자는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360년 그는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 사이의 강화 조약을 중재하였다. 1362년 아키텐 공의 지위에 올랐지만 알브레를 비롯한 가스코뉴 지역의 귀족들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364년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에게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용병단의 약탈 행위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366년 에드워드 흑태자는 카스티야 왕국의 페드로 1세, 나바라 왕국의 카를로스 2세와 계약을 체결하여 페드로 1세에게 차관을 빌려주는 담보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항구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와 비스케이를 조차지로 삼았다. 이는 나바라 왕국과 연결되는 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367년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의 이복 동생이자 라이벌이었던 엔리케가 에드워드에게 도전장을 보내왔다. 같은 해 에드워드는 격전 끝에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를 물리쳤지만 수 개월 뒤 에드워드는 비스케이에 대한 통치권을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페드로 1세의 빚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 아키텐으로 돌아갔다.
에드워드 흑태자는 알브레를 비롯한 아키텐의 귀족과 각 계급이 1368년부터 5년에 걸쳐 10 솔리두스의 노세(爐稅 - 벽난로의 수에 따라 부과된 일종의 재산세)를 내도록 하였다. 1369년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전쟁을 벌이게 되자 에드워드는 1370년 리모주를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흑태자는 1371년 잉글랜드로 귀환하였고 다음해 아키텐과 가스코뉴 공의 지위를 사임하였다. 1376년 에드워드 흑태자는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다. 시신은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