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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노키 마사시게(일본어: 楠木正成 くすのき まさしげ[*])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출신은 확실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다치바나씨의 후예라 했다. 자식으로는 마사유키(正行), 마사토키(正時), 마사노리(正儀)가 있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楠木正成 | |
신상정보 |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 난보쿠초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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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불명[1] |
사망 | 겐무 3년 음력 5월 25일(1336년 7월 4일) |
별명 | 다몬마루(아명), 마사시게 별명: 다이난공(大楠公) |
계명 | 靈光寺大圓義龍卍堂 |
주군 |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
관위 | 병위, 종5위하 검비위사, 좌위문위, 가와치노카미, 셋쓰노카미, 증 정1위 |
씨족 | 구스노키씨 |
부모 | 아버지: 구스노키 마사토(?) 어머니: 다치바나 모리나카의 딸 |
형제자매 | 구스노키 마사즈미 구스노키 마사시게 구스노키 마사스에 구스노키 마사이에 |
배우자 | 정실 : 히사코 (미나미에 마사타다의 딸) |
자녀 | 마사쓰라, 마사토키, 마사노리 |
묘소 | 오사카부 가와치나가노시 간신지 |
겐코의 난(元弘の乱, 1331년 - 1333년)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받들어 오토노미야 모리요시 친왕(大塔宮護良親王)과 연계, 지하야 성 전투(千早城の戦い)에서 대규모 막부군을 지하야 성으로 끌어들여 일본 전역에서의 반막부 봉기를 유발시킴으로써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공헌하였다. 또한 겐무 신정(建武の新政) 아래서 최고 정무 기관인 기록소(記録所)의 기인(寄人)으로 임명되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등과 함께 천황을 도왔다. 엔겐의 난(延元の乱)으로 다카우지가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든 뒤,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와 함께 남조측 군세의 일익을 맡았으나, 미나토강 전투(湊川の戦い)에서 다카우지의 군에 패하고 자결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로부터는 악당(惡堂)이라 불렸고[주석 1] 난보쿠초 시대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천재라는 것이 그에 대한 일관된 평가였으며, 「삼덕겸비」(三徳兼備)[주석 2], 「다문천왕(多聞天王)의 화생(化生)」(多聞天王の化生)[주석 3], 「일본 개벽 이래의 명장」(日本開闢以来の名将)[주석 4]이라는 평가를 받았다.[2] 『태평기』(太平記)에는 기상천외한 책략과 지모에 뛰어난 「불적」(不敵, 무적)의 전술가로써의 활약상이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사시게의 군사적 재능에만 한정된 일면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칼을 휘두르면서 전격전을 벌이고 막부의 재경(在京) 통치기관인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를 떨게 만들었던 맹장이자[3]. 축성 ・ 농성 전술을 발전시키고 경보병 ・ 게릴라 전법 ・ 정보전 ・ 심리전을 전투에 도입한 혁신적인 군사사상기[주석 5], 그리고 기나이(畿内)에 그치지 않고 일본 열도의 전란 전체를 내려다보며 좌우했던 불세출의 전략가였다.[4]
메이지 유신 후, 재평가되어 「다이난 공」(大楠公)이라 불렸으며, 1880년(메이지 13년)에는 정1위로 추증되었다. 또한 미나토가와 신사(湊川神社)의 주제신(主祭神)이 되었다.
일본 패전 전에는 마사시게의 충신으로써의 측면만이 과도하게 평가되었고, 그에 대한 대비로써 주군인 고다이고 천황이나 그 겐무 정권의 정책에 대한 저평가도 얽혀 있었는데, 해당 시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곤란하게 하였다. 그러나 패전 이후 2000년 전후에 이르러 마사시게의 주군이었던 고다이고 천황의 정책이 그 이전과 이후의 시대와의 연속성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태평기』에서 창작된 대로의 암군(暗君)이라는 고다이고 천황의 이미지는 개선되는 방향을 보이고 있다. 마사시게에 대해서도 무언가 한 가지의 측면에만 얽매인 인간이 아니라 무장 ・ 관료 ・ 상인 등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얼굴과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 밝혀져 가고 있다.
구스노키씨은 이요 다치바나씨(오치씨, 越智氏)의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마사시게 이전의 계도와는 일치하지 않고, 후세 창작으로 보인다. 가와치에는 다치바나 성의 유래가 되는 지명이 없고, 조상은 호조 집안의 가신으로 가와치로 이주했다는 설이 있다. 또 간토 지역 출신이라는 설과 하타 가문의 일족이란 설 등도 있다.
가와치국 이시카와군(石川郡) 아카사카촌(赤坂村,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内郡 지하야아카사카촌千早赤阪村)에서 태어났다.[1] 생년에 관해서는 확실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도 흔히 구스노키 마사토(楠木正遠)라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인물도 거론되고 있으며, 이 밖에도 그의 생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은 막부에 맞서 거병했던 겐코 원년(1331년)부터 미나토강에서 아시카가군에 패하고 자결하는 겐무 3년(1336년)까지의 6년에 지나지 않는다.
겐코 원년 린센지(臨川寺) 소유의 이즈미국 와카마쓰(和若松) 장원 관련 사료에 「악당(惡党) 구스노키 효에노이(楠木兵衛尉)」라는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아닌 가와치 중심의 수은 등의 유통 루트를 장악하고 활동하며 막부로부터 '악당'이라 불리게 된 호족일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시기에 이미 '효에노조'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조정과 연을 맺고 있었고, 따라서 고다이고 천황 내지 그의 주변 인물들과도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해 고다이고 천황의 거병 소식을 접하고 시모아카사카성(下赤坂)에서 거병, 가마쿠라 막부측의 유아사 조부쓰(湯淺定佛)와 싸워 승리했다(아카사카성 전투). 이때 천황과 구스노키를 연결해 준 것은 이가 가네미쓰(伊賀兼光) 혹은 진언종의 승려인 몬칸(文觀)으로 보인다.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섬으로 유배되었을 동안에도 야마토(지금의 나라현)의 요시노 등지에서 막부와 교전하고 있던 모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와치국의 가미아카사카성(上赤坂), 곤고산 중턱에 쌓은 지하야산성(千早) 등에서 게릴라 전법 및 분뇨를 사용한 오물공격 등으로 막부군에 맞서 분전했다.
그러한 그의 활약으로, 겐코 3년ㆍ쇼쿄 2년(1333년)에 이르면 센고쿠 각지에서 막부 타도의 움직임이 거세지게 되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円心) 등의 거병으로 마침내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겐코의 난). 교토로 개선하는 천황을 구스노키는 효고까지 나아가 마중하였고 천황의 경호를 맡았다고 한다.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마사시게는 기록소기인(記録所寄人)에 잡소결단소봉행인(雜訴決斷所奉行人) 등의 관직에 가와치ㆍ이즈미 등지의 슈고를 겸하게 되었고, 천황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당시 마찬가지로 천황을 도와 막부 타도에 공이 있었던 유키 지카미쓰(結城親光)ㆍ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ㆍ지구사 다다아키(千種忠顯) 세 사람과 더불어 '삼목일초'(三木一草)라 불리며, 그들의 공을 잊지 않고 있던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포상을 받았다.(《태평기》) 그러나 겐무 원년(1334년) 겨울, 호조씨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구스노키가 교토를 떠난 직후, 그의 정치적ㆍ군사적 동지이기도 했던 모리요시 친왕이 모반 혐의로 붙들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인도되는 사건이 있은 뒤 대부분의 관직을 사임한다. 이를 통해 구스노키는 모리요시 친왕의 유력한 조력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1335년)에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과 그의 신정에 반기를 들고 나섰고, 조정은 닛타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 토벌을 명하지만 요시사다는 하코네(箱根)ㆍ다케노시타(竹ノ下)에서 다카우지에게 패한다. 이때 구스노키는 오슈에 있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연락해, 요시사다 등과 함께 아시카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다.
교토에서 밀려난 다카우지는 엔겐 원년ㆍ겐무 3년(1336년)에 규슈에서 세력을 회복해 다시 교토로 진격해 왔다. 구스노키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모든 사회 혼란의 책임은 다름 아닌 천황의 정치에 있으며, 무력을 가진 무사 계급을 통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기에는 구게 중심의 정치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점과 그들 무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다카우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치고 다카우지와 화친할 것을 천황에게 진언했지만 천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천황에게 교토에서 잠시 철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닛타 요시사다의 휘하 장수로 출진할 것을 명받은 구스노키는 미나토강(湊川, 지금의 일본 효고 현 고베 시)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군에 패했다.(미나토강 전투) 이때 구스노키는 동생 마사스에(正季)와 함께 서로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법명은 영광사대원의룡만당(靈光寺大圓義龍卍堂)이었다.
구스노키의 자식으로는 후세에 아버지를 이어 소남공이라 불린 마사쓰라(正行)를 필두로 마사토키(正時)ㆍ마사노리(正儀)가 있으며, 이들도 아버지가 섬겼던 천황을 따라 남조에 가담해 다카우지와 맞서 싸웠다.
남조의 시각에서 난보쿠초 시대를 그린 고전 《태평기》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공적을 유난히 강조해 서술하였고, 아시카가 집안의 사서인 《매송론》(梅松論)에서까지 구스노키는 동정적인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사한 마사시게의 목을 본 다카우지가 "죽고 없다 한들, 가족은 필시 만나고 싶을 게지"라며 그의 목을 정중하게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등, 청렴했던 그에게 보인 다카우지의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미나토 강에서 자결할 때까지 아시카가 군과 1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황이 구스노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후반에 다카우지는 구스노키가 그냥 자신에게 투항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추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이 있다.(이 이야기는 NHK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인용되었다.)
남북조 싸움이 결국 북조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조측에 가담해 싸우다 죽은 마사시게는 조적(朝敵, 역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에이로쿠(永綠) 2년(1559년)에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칭한 구스노키 마사토라(楠木正虎)가 조정에 헌금하면서 조상에게 씌워진 조적의 이름을 사면해달라는 탄원을 올렸고, 마침내 오기마치 천황의 명으로 마사시게는 조적의 이름을 벗을 수 있었다. 또 에도 시대에는 미토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마사시게는 충신으로 추대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존왕가에 의해서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 그 움직임은 후에 미나토가와신사(湊川) 창건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의 게릴라전과도 유사한 전술을 장기로 구사했던 마사시게의 전법은 에도 시대에는 구스노키류(楠木流) 군학(軍學)으로 널리 알려져, 마사시게의 후예를 칭한 구스노키 마사타쓰(楠木正辰)의 제자였던 유이 쇼세쓰(由井正雪, 由比正雪라고도)가 구스노키류 군학을 강연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남북조정윤론(南北朝正閏論)이 제기되어 남조가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면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대(大) 남공(楠公)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담(講談) 등에서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의 천재 지략가 제갈량(諸葛亮)과 견주어 참모적인 이미지가 거듭 붙여졌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황국사관(皇國史觀)의 영향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충신의 표상」, 「일본인의 귀감」으로서 상찬되어 수신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패도(佩刀)인 고류카게미쓰(小竜景光)는 야마다 아사우에몬(山田淺右衛門)의 손을 거쳐 메이지 천황의 패도가 되었는데, 메이지 천황은 청일 전쟁 중 대본영이 히로시마(廣島)로 옮겨질 때도 이 칼을 차고 갔다고 한다. 현재 이 패도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남조 공신의 자손에게도 작위를 하사하고자 그 자손을 탐문했지만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자손을 자칭하는 전국 각지의 많은 씨족 가운데 그의 직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가진 집안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닛타ㆍ키쿠치ㆍ나와 집안의 자손은 남작의 작위를 받은 것과 달리 구스노키 집안에는 작위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뒤 1940년(쇼와 10년)에 있었던 '대남공 600년제'를 전후해 구스노키 집안의 자손이 확인되었고 그를 모신 미나토가와 신사 안에 '구스노키 동족회'가 조직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니가타현에 그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는 가계가 존재하고 있는데, 성은 구스노키(楠木)가 아닌 미나미(南)라고 한다.
전후는 가치관의 전환과 역사학에서의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악당'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로, 여기서는 전쟁 전의 이미지와는 다른 마사시게의 인물상을 그려냈다. 다만 이 '악당'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에서의 이야기이고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악당이라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 내지 악행을 이루는 집단'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직까지도 마사시게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일본 NHK 방송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당당 일본사」(堂々日本史)에서 「겐무신정의 파괴,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 할복」(建武新政破れ、悪党楠木正成自刃す)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한 것에 미나토가와 신사가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쿠라이의 결별(櫻井の決別)'이라는 제목의 일본 창가는 1899년 6월 발표되었는데, 오치아이 나오후미(落合直文)가 가사를 짓고 오쿠야마 도모야스(奥山朝恭)가 작곡했다. 도쿄 대학 전신인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学校) 교수였던 오치아이는 학교 생도행군가 「미나토 강」의 제1편으로 이 「사쿠라이의 결별」을 발표하였다. 작곡가 오쿠야마는 오카야마 대학의 전신인 오카야마(岡山) 사범학교의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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