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의 총통 (1889–1945)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독일어 발음: [ˈaːdɔlf ˈhɪtlɐ], 1889년 4월 20일~1945년 4월 30일)는 독일의 정치인이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초대 퓌러로 잘 알려져 있다.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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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 사진 | |
총통기(지도자 겸 국가수상 상징기) | |
독일국의 지도자 겸 국가수상 | |
히틀러 내각 | |
임기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
전임 | 파울 폰 힌덴부르크 (국가대통령) |
후임 | 카를 되니츠 (국가대통령) |
부수상 | 헤르만 괴링 |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독일국의 수상 | |
히틀러 내각 | |
임기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
전임 | 쿠르트 폰 슐라이허 |
후임 | 요제프 괴벨스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부수상 | 프란츠 폰 파펜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 | |
임기 | 1921년 6월 29일 ~ 1945년 4월 30일 |
전임 | 안톤 드렉슬러 |
후임 | 마르틴 보어만 |
나치 독일 독일국의 제3대 육군최고지휘관 | |
임기 | 1941년 12월 19일 ~ 1945년 4월 30일 |
전임 | 발터 폰 브라우히치 |
후임 | 페르디난트 쇠르너 |
참모장 | 프란츠 할더(1938년 ~ 1942년) 쿠르트 차이츨러(1942년 ~ 1944년) 아돌프 호이징거(1944년 ~ 1944년) 하인츠 구데리안(1944년 ~ 1945년) 한스 크렙스(1945년) |
이름 | |
본명 | Adolf Hitler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9년 4월 20일(1889-04-20)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브라우나우암인 |
사망일 | 1945년 4월 30일(1945-04-30)(56세) |
사망지 | 나치 독일 베를린 퓌러엄폐호 |
소속 | 바이에른 육군 (~ 1919) |
정당 | 독일 노동자당 (1920년 ~ 192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21년 ~ 1945년) |
부모 | 알로이스 히틀러 (아버지) 클라라 히틀러 (어머니) |
배우자 | 에바 브라운 (1945년) |
종교 | 범신론[1] |
서명 | |
군사 경력 |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기의 히틀러 (1914년) | |
복무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
복무기간 | 1914년 ~ 1920년 |
근무 | 제16바이에른 예비연대[2][3] 국가방위군 정보국[4] |
최종계급 | 병장 (Gefreiter; 제국군)[5] 정보병 (Verbindungsmann; 국가방위군)[4]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상훈 | 철십자장 전상장 황금 당원휘장 |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하여 독일이 서약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군대를 대량 모집하여 취업률을 올렸고, 전쟁 자금이나 국가 민족의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지목하여 독일의 게르만족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히틀러 이전부터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 제1차,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혐오하였고, 이는 유대인 혐오 정책이 호응을 얻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6]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과 집시, 슬라브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유대인 족보라는 걸 만들어 할아버지가 유대인이어도 증손자를 잡아가는 정책을 펼쳤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막노동이나 생체 실험을 하고 병들면 총살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도망친 유대인들은 재산피해, 인명피해가 컸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동성애자와 장애인도 있었다. 그 이유는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깨고 전쟁을 선포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잇따라 참전한 미국에 인해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게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국가수상부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삼키고 발터 PPK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7]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만을 이용해 자살했다는 서술도 있다.[8]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 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