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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신야(일본어: 山中 伸弥, 1962년 9월 4일 ~ )는 일본의 의학자이며 줄기세포 연구자[1][2][3]이다.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명예소장·교수[4],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선임연구원, 일본 학사원 회원이다. 학위는 오사카 시립 대학 박사(의학).
야마나카 신야(2014년) | |
출생 | 1962년 9월 4일 일본 오사카부 히라오카시(현: 히가시오사카시 히라오카 지구) |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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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일본 |
출신 학교 | 고베 대학 의학부 의학과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 의학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
주요 업적 | 유도만능줄기세포 개발 |
수상 | 수상 경력 |
분야 | 의학 재생의학 생물학 간세포생물학[1][2][3] 발생생물학 발생공학 |
소속 |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오사카 시립 대학 의학부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유전자교육연구센터 교토 대학 iPS 세포 연구소 |
박사 지도교수 | 미우라 가쓰유키 |
박사 지도학생 | 다카하시 가즈토시 도쿠자와 요시미 |
영향을 받음 | 존 거든 |
야마나카 신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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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식 한자 표기 | 山中 伸弥 |
가나 표기 | やまなか しんや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야마나카 신야 |
통용식 표기 | 야마나카 신야 |
로마자 | Shinya Yamanaka |
2012년에 ‘성숙하고 특화된 세포들이 인체의 세포 조직에서 자라날 수 있는 미성숙 세포로 재프로그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공로로 존 거든과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5][6][7][8] 일본인으로서는 19번째 노벨상 수상자이자 일본의 두 번째 생리학·의학상 부문 수상자이다.[5]
오사카부 히라오카시(현: 히가시오사카시 히라오카 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는 당초 히라오카히가시 초등학교에 다녔지만[주 1] 나라현 북서부에 위치한 나라시의 가쿠엔마에로 이사하여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나라 시립 세이와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 후 대학교 1학년 때까지 가쿠엔마에에서 거주했다.[9]
중학교는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덴노지 중학교에 진학[10][11]했는데 중학교 3학년 때는 생도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 생도회장은 긴키 대학 이사장과 경제산업대신을 지낸 세코 히로시게였다.[12] 중학교 시절에 유도를 시작했으며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했는데 특히 고교 시절에는 유도 2단을 취득했다. 또한 야마나카와 세코는 자택도 가까워 중·고등학교 6년 간을 동급생이자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어서 같은 전차로 통학하고 있었다.[12] 고등학교에서는 세코도 유도부에 들어가 함께 유도에만 몰두했다고 한다.[12]
고등학교에는 오사카 교육대학 교육학부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현: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로 진학[10]하여 친구와 ‘가레산스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13] 아버지로부터 의사가 될 것을 권유받았지만 장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쿠다 도라오의 저서 《생명만은 평등하다》를 읽고 도쿠다의 삶에 감명을 받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14]
고베 대학 의학부 의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 오사카 병원 정형외과에서 임상연수의로서 근무했다. 학창 시절에 유도나 럭비를 하면서 10회 이상 골절상을 입는 등 부상이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인지라 정형외과의 길을 택했지만[16] 다른 의사에 비해 의료 기술면에서 서투르는 등 담당 지도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필요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자신을 향해 ‘자마나카’(ジャマナカ)[주 2]라고 불리는 일도 있어서 ‘적성에 맞지않았다’고 느꼈다고 한다.[17][18] 중증으로 된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린 여성 환자를 담당하여 환자의 전신 관절이 변형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중증 환자를 구하는 수단을 연구하기 위해서 연구자의 길을 택하게 됐다.[19]
곧바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질리기 쉬운 성격이지만[20] 정형외과에서 하는 일을 단조롭다고 느낀 적도 있어서 병원을 퇴직, 1989년에 오사카 시립 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야마모토 겐지로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약리학 교실에서 미우라 가쓰유키 강사의 지도 하에 연구를 시작했다. 애당초에는 언젠가 임상의로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한다.[17][18] 지도 교관이었던 미우라는 훗날 “매우 우수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연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다. 누구라도 좋아하게 되는 상쾌한 성격이었다”고 술회했다.[21] 1993년, “Putative Mechanism of Hypotensive Action of Platelet-Activating Factor in Dogs”(‘마취된 개에 있어서 혈소판활성인자의 강압기서’)라는 제목의 논문 제출, 박사학위(의학)를 취득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취득한 후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의 3배 연구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연구에만 몰두했는데 대부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일이 많았고 고된 일에는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22]
과학 잡지 공모에 닥치는데로 응모(본인에 따르면 30건 이상이라고 한다)하여 채용된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에 박사연구원으로서 유학, 토머스 이넬라리티 교수의 지도 하에 iPS 세포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 후 미국에서 귀국하여 일본 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PD)을 거친 후 일본 의학계에 복귀, 이와오 히로시 교수의 지도 하에 오사카 시립 대학 약리학 교실의 조수로 발탁됐다. 하지만 (취임 직후 당시의)연구 환경에서 미국과의 격차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민했으며 악전고투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미국과는 달리 실험용 쥐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험용 쥐의 관리에 쫓기기도 했다. 또한 당시로서는 iPS 세포의 유용성이 의학 연구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지 않았고 바로 도움이 되는 신약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이해를 얻지 못하는 등 급기야 반우울증 상태에 몰리기도 했다.[17][18] 기초 연구를 그만두고 연구의보다 급여가 좋은 정형외과 의사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던 찰나에 우연히 과학 잡지에서 찾아낸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의 공모에 ‘어차피 그만 둘거니까 연구직을 그만두는 계기를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응모했는데 채용에 이르러, 미국 시절과 닮은 연구 환경 속에서 다시 기초 연구를 재개했다.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서는 매일 아침 캠퍼스에서 조깅하고 컨디션 관리에도 힘썼다.[23]
2003년부터 과학기술진흥기구의 지원을 받아 5년 간 3억 엔의 연구비를 얻고 연구에 종사했다. 연구비 지급 심사 면접을 한 기시모토 다다미쓰는 “잘 될거라고 생각은 안했지만 박력에 감탄했다”라고 말했다.[17][18] 나라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서 iPS 세포 개발에 성공하고 2004년에 교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8월부터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그래드스톤 연구소 상급연구원을 겸임, 같은 연구소에 마련된 연구실과 일본을 한 달에 한 번을 왕복하여 연구에 전념했다.[24]
2006년 8월 25일, 미국의 학술지 《셀》에 교토 대학 재생의과학연구소 교수인 야마나카와 특임조수였던 다카하시 가즈토시 등에 의한 논문이 발표됐다. 논문에 의하면 야마나카 등은 쥐의 배성섬유아세포에 4개의 인자(Oct3/4, Sox2, c-Myc, Klf4)를 도입하는 것으로 ES세포와 같은 분화 다능성을 가진 쥐인공다능성줄기세포(iPS 세포 :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를 작성했다. 이 작성에는 다카하시 가즈토시와 함께 야마나카 연구실의 제1기 박사학위 취득자였던 도쿠자와 요시미가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에 있어서 야마나카 아래에서 작성한 Fbx15 노크 인 마우스의 존재가 같은 도쿠자와가 찾아내고 있던 Klf4의 식견과 함께 중요했다고 야마나카는 회고했다.[25]
2007년 11월 21일, 야마나카 연구팀은 연구를 한층 더 진행하여 성인의 피부에 발암유전자 4가지 종류 등의 유전자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ES세포와 유사한 인간 인공다능성줄기(iPS)세포를 생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그 결과를 논문으로 학술지 《셀》에 발표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26] 같은 날, 세계 최초로 인간의 수정란에서 ES세포를 만든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인 제임스 톰슨도 야마나카의 쥐 iPS 세포 생성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인간 피부에 발암유전자 등 4종류의 유전자를 도입하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 iPS 세포를 만드는 논문을 발표했다.[26]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황우석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주춤했던 줄기세포 연구가 단번에 진척을 보일 것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이 연구가 발표된 2007년 11월 21일에 곧바로 위스콘신 대학교의 연구에 지지를 표명하여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27] 일본 정부도 그해 11월 23일, 5년에 70억 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11월 28일에는 종합 과학 기술 회의에서 당시 후쿠다 야스오 내각총리대신은 자금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표명했다.[28]
마라톤을 취미로 삼아 나라 첨단과학기술대학원대학 시절에는 매일 아침 캠퍼스를 누비며 조깅했고 교토 대학에 옮기고 난 이후에도 점심시간에 가모가와강 주변을 30분 정도 뛰기도 한다.[22] 일본에 기부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기부 모금을 위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29] 2012년 3월 11일에 열린 교토 마라톤에서 야마나카는 자신의 완주를 조건으로 내걸고 소위 ‘크라우드 펀딩’으로 불리는 모금 방법에 의한 iPS 기금에 기부를 해달라고 호소했는데 금액은 무려 1,000만 엔 이상의 기부가 모였다. 마라톤에 출전한 야마나카는 4시간 29분 53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30] 또한 2007년도부터 2011년도까지 6억 엔 이상의 연구 예산이 일본 학술진흥회로부터 야마나카 연구 그룹에 지급됐다. 2013년 10월 27일에 열린 제3회 오사카 마라톤에 야마나카는 재차 모금 활동을 지원하는 ‘자선 대사’로 출전하여 4시간 16분 38초 만에 완주했다.[31][32]
2015년에 교토 마라톤에 출전하여 3시간 57분 31초 만에 완주했고[33] 2017년 교토 마라톤에서는 54세 나이에 3시간 27분 45초,[34] 이듬해 2018년 벳푸 오이타 마이니치 마라톤 대회에선 55세 나이에 3시간 25분 20초로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35]
수상 소식을 들은 당일 인터뷰에서 “집에서 세탁기를 한창 수리하고 있을 때 수상 소식을 접했다”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문부과학대신 다나카 마키코의 제안으로 2012년 10월 19일에 노다 요시히코 내각은 각료 간담회에서 노벨상 수상 축하금으로 야마나카에게 세탁기 구입비 16만 엔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36]
2013년 1월, 아베 신조 내각의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대신은 예방한 야마나카에게 유도만능줄기세포 연구에 대해서 향후 10년 동안 1,100억 엔 규모의 장기적인 지원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37]
2020년 3월 19일, 전세계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스스로 정보를 발신하기 위해서 ‘야마나카 신야에 의한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정보 발신’[38]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39]
2010년에는 교토 대학에 신설된 iPS 세포 연구소(CiRA)의 소장으로 취임하여 6기(12년)에 걸쳐 iPS 연구의 지도·지원을 담당했다. 2022년에 소장직에서 퇴임했고 CiRA 교수·주임 연구자로서 연구 최일선에 복귀했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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