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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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於宇同,1440년 ~ 1480년 10월 18일)은 조선 전기의 시인, 서예가, 작가, 기생, 무희였다. 그녀도 본래는 양반가 출신 여성으로 남편에게 이혼된 후 기녀가 되었으며, 조선 성종 때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연루된 성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본래는 왕족 태강수 이동의 아내였으나 태강수 이동에 의해 버림받았다. 시와 서화에 능하였으나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어우동 於宇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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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본명 | 박구마 朴丘麻[1] |
별칭 |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 |
출생 | ? 조선 충청도 음성군 음죽 |
사망 | 1480년 10월 18일 (향년 41세) 조선 한성부에서 사사됨. |
직업 | 시인, 서예가, 작가, 사상가, 화가, 무용가 |
학력 | 한학 수학 |
종교 | 유학 성리학 |
분야 | 시문학, 서화 |
부모 | 박윤창(부), 정귀덕(모) |
배우자 | 태강수 이동(이혼) |
자녀 | 이번좌(딸) |
친척 | 박성근(오라비) |
주요 작품 | |
영향 |
일찍이 은장이(銀匠)을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하려고 했다.[2] 그 사실이 알려져 어우동은 친정으로 쫓겨가게 되었다.[2] 그러나 이는 누명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 뒤 여러 남성과 사귀었고, 그의 시, 거문고 등의 재주를 높이 사서 당대의 명사와 유생, 부녀자들까지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단순한 시문과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와 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이혼한 뒤였는데도 왕족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간통으로 몰려 죽게 된다.
1480년(성종 11) 어우동과 관련된 성문란 행태가 발각되어 김종직, 사림파, 이덕숭(李德崇[3]) 등의 탄핵을 받고 어우동은 의금부에 잡혀갔다. 이때 풍기문란으로 문초를 당했으나 남성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그녀가 체포되었을 때 방산수 이난이 그를 변호하였고, 그의 권고로 사실을 밝혔다.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의 사대부 고관인 남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고 중인이었던 박강창, 홍찬 등은 하옥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과 유배로 주장이 나뉘었으나 결국 사림파와 훈구파의 맹공을 받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혼자 사사당했다. 조선조 최대의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이었으나 그녀와 통정한 인물들은 모두 사면되었고, 그녀만 사형당하여 동정여론이 일기도 했다.
시문과 작품을 남겼으나 음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각되거나 파괴되었다. 유감동, 황진이,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오래토록 부도를 어긴 여성의 대명사로 매도당하고 지탄받았다. 또한 희빈 장씨, 장녹수, 문정왕후 등과 함께 조선사회의 악녀의 한사람으로 비판받아오다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되었다. 흔히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 부른다.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죽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