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
조선의 문신, 시인, 화가 (1537–161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윤근수(尹根壽, 1537년 ~ 1616년 8월 17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시인·화가이며, 서인(西人)의 일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외암(畏菴), 시호는 문정(文貞)이다.[1]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이다.
간략 정보 윤근수尹根壽, 임기 ...
윤근수 尹根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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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의 수적서첩 | |
조선국 형조판서 | |
임기 | 1589년 5월 ~ 1589년 8월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이름 | |
별명 |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외암(畏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시호는 문정(文貞).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37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616년 8월 17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국적 | 조선 |
학력 | 1558년 별시문과에 급제 |
경력 | 문신, 정치가, 시인, 화가 |
정당 | 서인 후예 잔존 세력 |
부모 | 윤변(부), 팔기 현씨 부인(모) |
형제자매 | 윤춘수(이복 형) 윤두수(동복 형) |
배우자 | 풍양 조씨 부인 |
자녀 | 아들 윤환(尹晥) 아들 윤질(尹晊) |
친인척 | 조카 윤흔, 윤방, 윤훤, 서조카 윤우, 윤간, 종손 윤신지, 외할아버지 현윤명, 사돈 이전, 인척 원균, |
종교 | 유교(성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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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과거 급제 후 승정원 주서, 춘추관 기사관, 연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1563년 이량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윤원형, 심통원 등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그 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75년의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으로 분당될 때 이황에게서 수학한 동문들을 따르지 않고 서인(西人)이 되었다.
1589년 공조참판으로 종계변무사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파견, 명나라 공식 기록인 대명회통의 이인임의 아들로 된 이성계의 가계를 이자춘의 아들로 수정하게 하는데 성공,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고,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1604년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밖에도 광해군을 수행한 공로로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추록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의 인척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서인 중 몇안되는 이황학파 사람이었다. 김덕수(金德秀), 이황(李滉)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