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전투 (1941년)
동부 전선 전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키예프 전투(러시아어: Битва под Киевом, 독일어: Schlacht um Kiew)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소련 군대에 대해서 소련령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진행했던 거대한 포위전이다.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군이 포위된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이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부로 1941년 8월 23일부터 9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3] 소련 군사사에서는 이 전투를 키예프 방어전(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또는 키예프 전략방어전(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이라고 부르며, 날짜로 7월 7일부터 9월 26일까지 다르게 잡고 있다.
키예프 전투 (194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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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의 일부 | |||||||
쑥대밭이 된 키예프를 내다보는 독일군 병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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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지휘관 |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
세묜 부됸니 (9월 13일 해임) 미하일 키르포노스 † | ||||||
병력 | |||||||
500,000명 | 627,000명[1] ~ 800,000명 | ||||||
피해 규모 | |||||||
128,670명 이상[2] 26,856명 사망 96,796명 부상 5,008명 실종 |
700,544명 이상 616,304명 사망 또는 포로 84,240명 부상[1] |
붉은 군대의 남서전선군은 약 66만명이 포위되어 있었다.[4] 그러나, 키예프 포위는 완벽히 되지 않았고 붉은 군대의 작은 그룹들은 독일의 협공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부 포위망에서 탈출했으며 원수 세묜 부됸니, 세묜 티모셴코, 정치위원 니키타 흐루쇼프 등도 탈출했다. 남서부 전선군 지휘관 미하일 키르포노스는 포위망에 갇혔고 이후 사망했다.[5] 키예프의 재앙은 1941년 6-7월의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보다 더한 사상자가 나오는 전례없는 패배를 당했다. 9월 1일, 남서부 전선군은 752,000 ~ 760,000명(지원군 포함 850,000명), 박격포 3,923문, 전차 114대, 전투기 167기를 잃었다.
10월 1일 최종적인 포위전이 끝났을 때에는 병사 452,700명, 포 2,642문, 전차 64대가 포위되었으며 10월 2일에는 거의 15,000명이 탈출했다. 전반적으로 남서부 전선군은 616,304명 사망, 부상, 포위 등 키예프 전투에서 총 700,54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결과, 소련 야전군 5, 37, 26, 21, 38군 등 5개 야전군에서 43개 사단이 완전 파괴되었다. 40군도 전투 불가능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이전의 서부 전선군처럼 남서부 전선군도 처음부터 군을 재편성해야만 했다.[6] 키예프는 1943년 11월 2차 키예프 전투에서 다시 탈환한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