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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모토 고민
일본의 의사, 난학자 (1810–1871)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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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모토 코민(일본어: 川本幸民, かわもと こうみん, 1810년 ~ 1871년 7월 18일)은 막말의 의사, 난학자이다. 이름은 유타카(裕, ゆたか), 호는 유켄(裕軒, ゆうけん)이다. 다수의 업적을 남겨 일본 화학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았다.[1][2].

코민은 화학신서를 시작으로 다수의 과학기술서적을 남겼다. 전문성을 기초로 설탕 제조[a][3], 성냥 제조[4][5], 은판사진술[4]을 테스트하는 등 일본 기술발전에 기여했다. 또 코민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양조한 사람으로 추정된다.[b][8][3][1][4] 또 당시 사용되던 사밀(舎密) 대신 화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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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카와모토 코민은 셋쓰국(현 효고현 산다시)에서 1810년에 타어났다.[8][13][4] 아버지는 미타 번 시의였던 川本周安.[8][14]
10세때부터 번교에서 공부를 시작해 1827년에는 木梨村(현 가토시)에서 1년간 한방의학을 배웠다.[13]. 1829년 미타 번주의 명으로 서양의학을 배우기위해 에도로 유학을 갔다. 足立長雋、坪井信道등에게 난학을 배웠고 물리 화학을 배웠다.[13][4][10].
1833년 귀향하여 아버지처럼 번의로 임명되었으며 青地林宗의 딸 히데코(秀子)와 결혼했다. 하지만 다음해에 상해사건으로 6년간 칩거하게 되었고 또 두번이나 화재가 생겨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13][4]
그에 비해 1840년대 후반부터는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1848년에는 백린을 이용해 성냥을 시험제작했고 1851년에는 『気海観瀾広義』를 포함해 다수의 번역과 저술을 남겼다.[4]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에게 발탁되어 1854년에는 사쓰마번에 적을 두고 번교의 학두로 일하게 되었다. 조선소 건조 지도를 위해 사쓰마에 직접 가서 일했다.[8][13][4] 이 시기의 제자로 寺島宗則나 하시모토 사나이 등이 있다.
1859년 반쇼시라베쇼의 교수가 되었다.[13] 1861년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번역서 화학신서『化学新書』를 출판하여 근대화학을 일본에 이식했다. 宇田川榕菴의 『舎密開宗』와 함께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화학책이다. 반쇼시라베쇼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12].
1868년 고향으로 돌아와 사숙인 영란숙(英蘭塾)을 열었으며 분교도 생길만큼 학생들도 모였다.[13][15] 이후 아들이 태정관에서 일하게 되어 함께 도쿄로 갔다.[13][3] 1871년 6월 1일 도쿄에서 사망했다.[8][3][13]
1953년에는 미타시립초등학교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고[9][16] 2010년에는 小西酒造사가 코민이 만든 맥주를 복원하여 판매했다.[1][17][18]
일본 학사원에는 코민 관련 다수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일본화학회의 화학유산으로 인정되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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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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