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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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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독일어: Georg Friedrich Händel, 영어: George Frideric Handel 조지 프리더릭 핸들[*], 1685년 2월 23일 ~ 1759년 4월 14일)은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이다. 헨델은 46곡의 오페라와 우수한 오라토리오를 비롯하여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쳄발로, 오르간 분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여 생생한 리듬에 성악적이라고 평가된다.


음악 듣기
독실한 개신교(루터교) 신자인 헨델 역시 바흐처럼 개신교회 교회음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개신교인 영국국교회와 교회음악을 위한 노력을 하였고, 대표적인 교회음악은 《메시아(Messiah)》로서 당시 영어 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1]의 구절에 곡을 붙인 오라토리오이다. 아시아 권에서는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최근 잘 사용하지 않는 추세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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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헨델은 프로이센의 할레(현재는 독일 영토)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피렌체 등지에서 활동하다 1712년 이후 런던에 정착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하였지만, 한 달만에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2020) 이후 앤 여왕의 비호를 받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영국에 귀화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살면서 오페라 46작품과 오라토리오 23작품, 많은 양의 교회음악은 물론 많은 기악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헨델의 일생이 그리 평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악파인 조반니 보논치니(1670년-1747년)와는 음악상의 적수였다. 이들의 경쟁과 헨델을 질투하는 음모 때문에 수차례의 파산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지만 헨델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보논치니의 질투를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
1708년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수업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만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연주 시합를 하여 그 뒤부터 그와 친교를 맺었다
헨델은 그 후 영국으로 건너가 1732년까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필생의 대작인 《메시아》를 24일이란 단기간에 탈고하였고[3] 1742년 4월 12일 더블린에서 초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메시아》 초연후 8년째인 그가 65세 되던 해에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생존 중 《메시아》 공연만 해도 34회나 되었다고 한다.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4]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 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년∼1751년까지도 거의 모든 삶을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몰두하였다.
헨델은 가난한 음악가 구제회에 1,000 파운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서 존경을 받아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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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음악적 특징
헨델은 그 명성을 거의 그의 극적 작품에서 얻었지만 통주저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기초를 두고 유려한 벨칸토의 성악적 멜로디와 결부하여 항상 간결·명쾌하며 밝은 표현을 나타냈다. 그의 멜로디에서 벨칸토 양식은 독일의 내면적인 힘찬 표현과 결부되어 호모포니의 방향으로 향한다. 또한 바로크 특유의 일정한 악형(樂型)의 반복이 사라반드, 쿠랑트, 가보트 등의 리듬에 지탱되면서 단조롭게 고수(固守)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바흐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의 길이라든가 다양성은 없으나 그 대신 알기 쉽고 명쾌한 표정을 보여준다. 그는 합창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업적
요약
관점

개요
헨델은 42편의 오페라, 24편의 오라토리오, 120곡이 넘는 칸타타와 트리오, 듀엣, 수많은 아리아, 오드, 세레나타, 솔로 및 트리오 소나타, 18편의 합주 협주곡, 12편의 오르간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로, 그 중 "할렐루야" 합창은 합창 음악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프라하의 로프코비츠 궁전에는 모차르트가 직접 손글씨로 주석을 단 메시아 악보가 소장되어 있다.
헨델 생전에 출판되어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오르간 협주곡 Op. 4와 Op. 7, 합주 협주곡 Op. 3과 Op. 6이 있으며, Op. 6에는 이전의 오르간 협주곡인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이 포함되어 있다. 이 곡에서는 오르간의 고음역을 활용해 새소리를 모방하고 있다. 헨델의 건반 모음곡 16곡도 주목할 만하며, 특히 *조화로운 대장장이(The Harmonious Blacksmith)*가 잘 알려져 있다.
작품 목록
헨델 작품의 첫 번째 목록은 메인워링(Mainwaring)의 회고록 부록으로 출판되었다. 1787년부터 1797년 사이, 새뮤얼 아널드는 헨델의 작품을 180권 분량으로 편집했지만, 이 목록은 완전하지 못했다.[5] 1843년부터 1858년까지 영국 헨델 협회에서도 작품집을 발간했지만 역시 불완전했다.[6]
1858년부터 1902년까지 프리드리히 크리산더의 노력으로 105권에 달하는 헨델 게젤샤프트(Händel-Gesellschaft, 헨델 협회) 판이 발간되었다. 이 판본은 19세기 당시의 연주 관행을 반영하여 통주저음을 재현했으며, 노벨로 출판사에서는 이 판을 바탕으로 성악 악보를 출간했지만, 일부 작품(예: 삼손)은 불완전한 형태였다.
1955년부터는 동독 작센안할트주의 할레 지역에서 **할리헨델판(Hallische Händel-Ausgabe)**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연주용 판본 중심으로 출판되어 비판을 받았으며, 예를 들어 오페라 *세르세(Serse)*에서 주인공을 전통과 달리 테너로 바꾸는 등 전후 독일의 관행을 따랐다. 이후 비평판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편집자들이 주요 원본을 참조하지 않아 오탈자가 많고 편집 품질이 일정하지 못했다. 1985년에 편집 기준을 개선하기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소통 문제도 해소되면서 판본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7]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독일 음악학자 베른트 바젤트(Bernd Baselt)는 헨델의 작품을 **헨델 작품 목록(Händel-Werke-Verzeichnis, HWV)**으로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이 목록은 널리 인정받아 현대에는 헨델 작품 번호 체계로 사용되고 있으며, 예를 들어 메시아는 "HWV 56번"으로 분류된다.[8]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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