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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군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의 전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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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군(廣州郡)은 경기도 광주시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서울특별시 남부의 관문이자 대읍(大邑)이었으며, 2001년 3월 21일, 도농복합시인 광주시로 승격되었다.[1]
《대동여지도》
광주군은 현재의 광주시 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동구, 송파구(잠실동·신천동 제외), 서초구 염곡동·내곡동·신원동(이상 1963년 1월 1일 이관), 성남시(1973년 7월 1일 시 승격), 하남시(1989년 1월 1일 시 승격)를 관할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의왕시, 군포시 대야동, 안산시 상록구, 화성시 매송면, 남양주시 조안면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역사
요약
관점
고대 시대
본래 백제의 남한산(南漢山) 지역이다. 기원전 5년(백제 온조왕 14년)에 한산(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의 위례성에서 지금의 서울 송파구, 강동구 일대로 도읍을 옮기고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해 한성을 함락한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다.(근초고왕 26년인 371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4], 장수왕이 함락시킨 백제 수도는 한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 고구려는 한성에는 한산군을 설치하고, 한산에는 '북한산군'(남평양)을 설치하였다. 551년에 백제 성왕이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한성을 탈환하였으나, 553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557년(진흥왕 18)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으며,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현 이천시)를 설치하였다가, 604년(진평왕 26)에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주의 거점과 명칭이 한산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6] 757년(경덕왕 16년)에 시행된 한화(漢化) 정책에 따라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중세 시대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는 지금의 명칭인 광주(廣州)로 개칭되었다.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십이목(十二牧)을 두었는데, 이 때 광주에 광주목(廣州牧)을 두었다. 995년(고려 성종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했다. 1012년 (고려 현종)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7] 이때, 양광도에 예속되고 안무사를 설치하였다.
근세 시대
조선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명종 14년(1559년)에 목사가 파견되었고 1577년 (조선 선조 10년) 광주부(廣州府)로 승격하고 경안, 오포, 도척, 실촌, 초월, 퇴촌, 초부, 동부, 서부, 구천, 중대, 세촌, 돌마, 낙생, 대왕, 언주, 왕륜, 일용, 월곡, 북방, 송동, 성곶, 의곡면(儀谷面) (도합 23개면)을 관할하였다. 즉 이때 광주부가 승격되면서 광주군의 면이 생긴 것이다. 이후 1626년(인조 4년) 남한산성이 축성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 일용면과 송동면이 수원군으로 편입되었다.
광주목의 행정
1530년 이전에 광주목은 여주목, 이천도호부, 양근군, 지평현, 음죽현, 양지현, 죽산현, 과주현(과천현)을 관할하였다.[8] 행정 관리는 목사 1인(종 3품), 판관(判官) 1인(종 5품), 교수(敎授) 1인(종 6품)을 두었다.[9]
대한제국
- 1906년(대한제국 고종 44년) 군(郡)이 되어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 설치하고 북방면, 성곶면, 월곡면을 안산군에, 초부면을 양주군에 이관하였다.[11]
일제 강점기
- 1911년 8월 29일 상적리에 대왕면사무소를 개설하고 돌마면은 1911년 말 정자리에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
- 1914년 4월 1일 광주군 군내면 소속의 7개리 (산성, 검복, 불당, 오전, 광지원, 용미, 상산곡리) 와 세촌면 소속의 7개리 중 6개리 (단대, 상대원, 수진, 복정, 창곡, 탄리)를 관할로 하여 중부면이 신설되었으며, 세촌면 1개리(하대원리)는 돌마면에 편입되었음. 중부면 산성리에 군사무소를 배치하였다. 의곡면, 왕륜면을 합하여 의왕면(儀旺面)이라 하고 수원군에 편입되고, 양평군 남종면은 광주군으로 편입되었다.[12][13]
- 16면 - 경안면, 중부면, 동부면, 서부면, 오포면, 초월면, 실촌면, 도척면, 퇴촌면, 남종면, 낙생면, 돌마면, 대왕면, 언주면, 구천면, 중대면
현대
- 1946년 중부면 성남출장소 설치: 중부면은 면 중앙에 남한산성의 준령이 있어 그 서남기슭에 취락이 형성된 지역적 여건으로, 1946년 3월 3일 종전의 세촌면 관할구역 6개리(단대, 탄, 수진, 상대원, 복 정, 창곡리 27.43km2)를 관할하는 중부면 성남출장소를 설치하여 탄리 275번지에 개소하였다가 1948년 수진리로 옮겨 사무를 보게 되었다.
- 1963년 1월 1일 구천면 등이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다.[16] (13면)
- 1964년 2월 24일: 광주군 조례 제68호에 의거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승격되어 수진리 145번지에 성남출장소 건물을 신축 개소하여, 인구 및 행정수요 증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광주군수 직할 지휘 감독 체제로 전환하였다.
광주 대단지
서울특별시는 판자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성남)를 개발하여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 서울특별시는 1968년 5월 7일 건설부로부터 개발인가를 받아 1969년 4월 1일 "중부면 성남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조성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69년 5월 2일부터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지역)로 서울시의 철거민을 집단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들의 수는 14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17]
광주군은 1968년 8월 1일부터 1971년 8월 31일까지 "광주군 성남지구 도시건설 사업소"를, 서울특별시는 1968년 9월 1일부터 1971년 8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 광주대단지 사업소"를 각각 설치하여 도시계획 업무를 전담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와 더불어 개발초기의 성남의 행정업무를 보는 관청이 셋이나 되는 문제점이 도출되어 주민의 불편이 컸었다. 관할청과 사업 시행청이 다른데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의 효율적인 사업수행을 위하여 1970년 9월 19일,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광주군수간에 행정협약을 체결하고, 경기도와 광주군은 일반 행정을, 서울특별시는 용지 매수 및 건설사업을 분담 실시할 것을 규정하였다.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의 시행으로 광주군 성남출장소 관할 인구가 14만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행정수요 충족이 불가피하게 되어, 도조례 제470호(1971. 8. 18. 공포)에 따라 기존 광주군 성남출장소 관내 6개 리와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 전역 128.5km2을 관할 구역으로 1971년 9월 13일 경기도 관할 성남출장소를 설치하여 집무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이원적인 행정을 일원화하여 성남도시건설을 일관성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1971년 10월 14일 서울특별시에서 시행하던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을 경기도에서 인수하고 "성남개발 3개년 투자계획"에 의거 도시건설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성남시 승격·독립 이후 ~ 광주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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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광주군의 연도별 인구(내국인) 추이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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