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국조명신록 (이존중)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현종대에 이르는 주요 인물 384명의 간략한 전기를 저술, 편찬한 인물지이다. 상하 2책이다.
《국조명신록》이라는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이존중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다(후술).
개설
요약
관점
김영건은 명신록이라는 서적류를 '한 인물의 사적을 도입부(소전)-사적부-평결부로 나누어 기존 자료에서 해당 인물과 관련된 기록을 발췌하고 수록한 차기류 작품'으로 정의하였다.[1] 조선에서 간행된 명신록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정인지(鄭麟趾)의 《고려명신록》(高麗名臣錄) 외에도 주세붕(周世鵬)과 류성룡(柳成龍)의 《국조명신언행록》 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기록으로만 전하며, 임진왜란 이후 여광헌(呂光憲)의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김육의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과 《국조명신록》, 정도응(鄭道應)의 《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 송징은(宋徵殷)의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과 그 아들 송성명(宋成明)의 《국조명신록》, 이존중의 《국조명신록》과 이익진(李翼晉)의 《명신록》(名臣錄) ․ 정조의 《해동신감》(海東臣鑑) 등이 있다.
《국조명신록》에 실린 각 전기들의 문장은 편자가 새로이 창작하지 않고 기존 자료에서 중요하다고 저자가 판단한 부분을 발췌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였다는 것이 《국조명신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국조명신록》은 기존의 《동국여지승람》, 《문헌통고》 등의 관찬(官撰) 사료뿐 아니라 《잠곡집》, 《동각잡기》, 《지봉유설》 등의 사찬(私撰) 자료들도 상당히 활용하였으며, 여러 사람들의 비갈이나 묘지명, 개인의 집안에 전승되어 내려오던 자료들도 풍부하게 사용하는 등 자료 수집에 힘을 쏟았다. 동원된 서적과 자료는 317종에 달한다. 이 점은 《국조명신록》의 신빙성과 사료적 가치를 높여 주는 중요한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조명신록》에서 주요 자료로 인용한 사찬 자료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된 인물과 저술은 김육(71회)과 그의 문집인 《잠곡집》(59회)으로 거의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는 점은 《국조명신록》의 저술에 있어 김육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로 꼽힌다(김육 또한 동명의 저술을 지었다).
저자로 알려진 이존중은 영조 27년(1751년)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당시의 유력 대신이던 김약로, 김상로 형제를 탄핵하였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2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관직 생활을 병행하면서 《국조명신록》을 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국조명신록권후'에는 이존중이 종숙인 이상성이 집록한 자료를 이어받아 완성한 것이라고 밝혀 놓고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존중 자신의 단독 편서라기보다는 종숙 이상성과의 공동 편찬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Remove ads
저자 이존중에 대하여
《국조명신록》에는 편찬 시기를 알려 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책에 수록된 인물들이 현종대를 하한으로 하고 있어서 숙종대에 편찬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존중은 숙종 29년(1703년)생으로 숙종대가 끝났을 때 겨우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는데 이 정도 수준의 인물지를 편찬하기는 불가능하고, 영조 28년(175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축적한 학문적인 역량과 신중해진 정치적 견해를 바탕으로 썼다고 보는 쪽이 보다 타당할 것이라는 지적도 존재한다.
또한 인물 선정에 있어서 대체로 이존중 자신이 노론(老論)의 당색(黨色)을 지니고 있었고 서인(西人, 특히 노론) 계통의 인물이 좀 더 많기는 하지만 반대 당파인 동인(東人)과 남인(南人) 가운데서도 중요한 인물은 빠뜨리지 않고 수록함으로써, 당파적인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공정하게 인물을 선정하였다는 점 또한 높게 평가된다.
근래, 이존중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국조명신록》이라는 책은 실제로는 송징은의 《국조명신언행록》의 필사, 교정본이며, 이존중은 《국조명신록》이라는 이름의 저술의 순수 저자가 아닌 단지 필사자에 불과한데 후세에 저자로 와전되어 알려졌다는 견해가 2024년 제기되었다(국조명신록과 국조명신언행록 항목 참조).
Remove ads
사본
이존중이 썼다고 알려진 《국조명신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청구기호 奎5721) 전집14권, 별집11권, 외집16권, 속집1권, 후집21권으로 총 63권 30책에 이른다.
국조명신록과 국조명신언행록
요약
관점
본서 《국조명신록》은 이존중의 저술로 알려져 왔지만, 이존중이 실제 저자가 아니라 이존중 자신도 기존에 존재하는 서적을 필사, 교정한 것이고 그 원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선 송징은의 《국조명신언행록》과 이존중의 《국조명신록》, 이익진의 《명신록》이 모두 목차의 순서와 수록된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2]
송징은과 이존중의 저술을 비교하였을 때 송징은의 저술에서 이황(李滉)-성수침(成守琛)-서경덕(徐敬德)-류희춘(柳希春)-이항(李恒)-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기대승(奇大升) 순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이 이존중의 저술에서는 이항-성제원-이중호-기대승-이황-성수침-서경덕-류희춘 순으로 바뀌어 있고, 이이의 경우 송징은의 저술에서는 외집 권12에 수록되어 있지만 이존중의 저술에는 권14-15로 나누어져 있고, 송징은의 저술에서 후집 권13-14에 수록된 인물이 이존중의 저술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이를 제외하고는 권수에 수록된 인물의 차이는 있으나 수록된 순서는 양자간이 모두 동일하다.
또한 필사 내용에 있어서도 일부 차이가 있는데, 일부 자구의 추가가 확인될 뿐 아니라 송징은의 저술 필사본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오류들이 이존중이나 이익진의 저술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심덕부의 소전(小傳) 서술의 경우 송징은의 저술은 심덕부의 시호가 '공정공'(恭靖公)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이존중이나 이익진의 저술에서는 정안공(定安公)으로 되어 있다. 실제 《태종실록》에 실린 심덕부의 졸기에는 심덕부의 시호가 '정안공'으로 기술되어 있어 이존중이나 이익진 쪽이 정확하게 기술한 것이다. 류관(柳觀)의 경우도 송징은의 저술에서는 류관의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썼으나 이존중의 저술에서는 문간(文簡), 이익진의 저술에서는 '문정'(文貞)이라고 했다가 '문간'(文簡)으로 수정한 부분이 확인된다. 즉, 소전 내용에 있어 송징은의 저술에서 상략이나 인물의 정보 오류가 있었던 것이 이존중, 이익진의 저술에서는 수정되어 있는 것이다.[3]
김영건은 이를 근거로 이존중이나 이익진이 찬한 것으로 알려진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은 실제로는 송징은의 저술인 《국조명신언행록》을 토대로 필사된 것이며, 이존중이나 이익진은 '국조명신록'이라는 해당 저술의 '저자'가 아니라 '필사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
단지 필사하면서 생긴 몇몇 오류를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찬자를 각각 달리하였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이덕수가 지은 송징은의 신도비에서 "잠곡 김육이 편찬한 명신록은 간략하여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공이 패사(稗史)와 야승(野乘)을 널리 참고하여 조선 초기부터 인조 때까지 남김없이 다 기록하였다. 책이 완성되었으나 미처 산정하지 못했다."(金潛谷所編名臣錄, 略而不備, 公廣考稗史野乘, 起國 初, 迄仁廟朝, 備錄無遺, 書成而未及刪正)[5]라고 한 것과, 김려가 지은 '제국조명신록권후'에서 "고(故) 지정(芝汀) 원재명(元在明)의 집에 소장된 《국조명신록》은 누가 편찬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전해지는 말로 '하당(荷堂) 이존중이 편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건대 청도군수(淸道郡守) 김기서(金箕書)가 '종숙(從叔)인 현령(縣令) 김상성(金相聖)이 집록한 것이고 하당의 손에서 완성되었다.'라고 하는데, 아마도 맞는 듯하다. 책은 모두 30권인데 저곡(苧谷) 박씨(朴氏)가 빌려 가서 6편을 잃어버렸으니 김기서와 이존중은 모두 후손으로 지혜롭지 못하다."(故芝汀元侍郞孺良家所藏『國朝名臣錄』, 不著誰人所述, 傳者以爲荷堂李公存中所纂, 余聞淸道倅金侯箕書言, 以爲其從叔縣令諱相聖之所輯錄, 而成於荷堂之手, 想當然. 書凡三十卷, 苧谷朴台借去, 逸其六編, 金李俱後承不慧)[6]라고 한 것에서, 이존중이 《국조명신록》이라는 저술의 찬자(원저자)인 것처럼 퍼지게 되었다고 하였다.[7] 김려 역시도 자신이 본 《국조명신록》의 저자가 이존중이라는 것은 '전하는 말'이라고만 했지 확실하게 이존중의 저술이라고 단언하거나 그렇게 볼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한편 김려는 자신이 본 《국조명신록》이 6편을 잃어버렸다고 언급하였는데, 현존하는 이존중의 《국조명신록》에는 송징은의 저술과 비교하여 후집 권13-14에 수록되었던 인물이 누락되어 있다.
요컨대 이존중의 저술로 알려진 《국조명신록》은 실제로는 순수한 이존중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송징은의 《국조명신언행록》을 필사한 것으로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라는 것이 된다.
Remove ads
구성
《국조명신록》의 구성은 상하 2책으로, 본편에 해당하는 상책에는 전집과 후집으로 나뉘고, 하책에는 별집, 외집, 속집이 배치되어 있다.
전집과 후집은 조준, 백홍걸 등 고려 후기부터 조선 현종대까지 조정에서 고관을 역임하였던 215명이 전집에 130명, 후집에 82명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인물들의 생년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 성종대까지를 '전기'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인원수는 전집이 많지만 분량은 후집이 더 많은데, 편찬자가 연산군대 이후에 활약한 인물들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별집의 경우 단종대 계유정난의 피화인(被禍人) 김종서 이후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일련의 정치적 숙청 사건에 연루되었던 피화인, 임진왜란, 병자호란 및 기타 대외관계에서 공로를 세우거나 절의를 지킨 인물 103명이 실려 있다. 이들의 경력은 전집, 후집과 달리 대다수가 문과 출신이기는 하지만 고위 관원이나 공신의 비율은 크게 떨어진다.
그밖에 외집에는 김굉필 등 조선 시대 문묘 종사자 10명을 포함한 뛰어난 학자들 52명이 배치되어 있고, 조선 전기가 14명, 후기가 39명이어서 후기의 비중이 상당히 커졌을 뿐 아니라, 객관적 경력으로 보면 수록된 인물 가운데 문과 통과자는 절반을 넘지 않고 고관이나 공신의 반열에 오른 자들도 거의 없다. 반면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의 조선 시대 학자 14명 가운데 10명이 외집에 들어가 있는데, 별집이 '충의'와 '절개'에 중점을 두었다면 외집은 '학문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을 선정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속집에는 최덕지 등 세상을 피해 살았던 은일(隱逸)이나 기이한 재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기사(奇士)를 선정하여 12명을 수록하였다. 이들은 현실적인 출세나 학문적 성취는 앞서보다 떨어져도 방외인적 행동과 자유로운 사고를 펼친 독특한 인물들이 많이 실려 있다.
수록된 인물 거의 대부분이 문과 급제 뒤 현직에 올랐고, 다수가 공신에 책봉된, 경력상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다는 사실에서 대체로 조정에서 고관을 역임한 인물들이 선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Remove ads
각주
참고 문헌
같이 보기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