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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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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신감(海東臣鑑)은 조선 영조(英祖) 48년(1772년) 당시 왕세손(王世孫)으로 있던 산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상일(李商逸)과 함께 편찬하여, 신라 설총(薛聰)에서부터 조선조 윤계(尹棨)까지 191인 문신의 언행과 사적을 요약, 수록한 책이다.
개설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이 책이 명(明)의 《역대신감》(歷代臣鑑)의 체제를 본떴다고 설명하면서[1] 한편으로 잠곡(潛谷)이 편찬한 책(해동명신록)에서 뛰어난 사람만을 뽑은 것이라고 밝혔다.[1]
정조는 해동신감을 편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대체로 본받을 만한 선행을 한 사람들을 찬양하면, 어진 이를 본받고자 하는 이들이 기준을 삼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
《해동신감》은 세손이자 차기 국왕으로써 정조 자신의 인물에 대한 평가와 등용의 기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2] 정조는 본국에 충의로운 신하와 간쟁하는 신하 및 뛰어난 인재, 높은 식견을 소유한 자, 고상한 인격자, 수양이 각별한 선비들을 다 세자면 이루 다 셀 수도 없지만 《송명신언행록》도 겨우 97명밖에 수록하지 않는 엄정함을 보였다며 "지금부터 억만년이 지나도록 임금을 도와 태평 시대를 이룩할 명신들이 (해동신감에 수록된) 이들의 뒤를 이어 나올 것이고 다 쓸 수 없을 만큼 그 수도 불어나게 될 것"[1]이라는 기대로 이 책을 간행하지 않고 초고로써 두었다고 적고 있다.
정조는 계방(桂坊, 세자익위사) 이상일과 함께 밤낮으로 며칠 동안 대교(對校)를 거쳐서 책을 완성하였다. 필사 및 교정은 이상일이 수행하였으나, 실제 편차를 정하고 축약하는 것은 정조 자신이 직접 진행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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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본
《해동신감》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 유일본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10행(行), 상하향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의 목판 인찰공책지(印札空冊紙)에 필사하였다. 표지 서명 하단에는 책차(冊次)가 ‘건(乾)·곤(坤)’으로 기재되어 있다. 건책(乾冊) 권수제면(卷首題面) 오른쪽 밑에 날인된 인장을 일부 도려낸 흔적이 있다. 정갈한 필체로 보아 출판을 위한 원고본으로 보인다.
목록 말미에 '시직 이상일 초'(侍直李商逸抄)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상일이 시직을 역임했던 영조 46년(1770년)부터 49년(1773년) 사이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각 책 제1면 우측 상단에 '장서각도서인'(藏書閣圖書印)이 날인되어 있다.
내용
요약
관점
수록된 인물은 신라 시대부터 16세기 선조 대까지 활약한 인물들이다. 기술 형식은 《해동명신록》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적고, 이름의 하단에 자와 호, 초명, 본관을 밝힌 뒤 이력 사항으로 등과, 관력 및 봉호, 시호, 문묘 배향 등에 관련한 사항을 세주(細註) 형식으로 두 줄로 써넣고, 이어서 인물의 언행과 사적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서술 가운데 별도의 내용이 전개되어 전환이 필요한 부분에는 둥근 권점을 두어 내용을 구분하고 있다.[3] 수록 인물은
- 건책 - 128명
-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충(崔沖),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권근(權近), 류관(柳觀), 하륜(河崙), 맹사성(孟思誠), 황희(黃喜), 허조(許稠), 노한(盧閈), 류정현(柳廷顯), 하연(河演), 윤상(尹祥), 최윤덕(崔潤德), 김반(金泮), 권홍(權弘), 윤회(尹淮), 박연(朴堧), 정인지(鄭麟趾), 정척(鄭陟), 정갑손(鄭甲孫), 박이창(朴以昌), 김종서(金宗瑞),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류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시습(金時習), 이석형(李石亨), 기건(奇虔), 김숙자(金叔滋), 황수신(黃守身), 어효첨(魚孝瞻), 구치관(具致寬), 신석조(辛碩祖), 홍일동(洪逸童), 서거정(徐居正), 윤필상(尹弼商), 이극배(李克培), 영천군 부(永川君 溥), 이파(李坡), 손순효(孫舜孝), 성간(成侃), 윤효손(尹孝孫), 정난종(鄭蘭宗), 허종(許琮), 어유소(魚由沼), 김종직(金宗直), 어세겸(魚世謙), 어유공(魚世恭), 성현(成俔), 안침(安琛), 홍귀달(洪貴達), 채수(蔡壽), 남효온(南孝溫), 주계군 심원(朱溪君 深源), 명양정 현손(鳴陽正 賢孫),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경연(慶延), 유호인(兪好仁), 성희안(成希顔), 신용개(申用漑), 이집(李諿), 정성근(鄭誠謹), 정붕(鄭鵬), 박영(朴英), 성세순(成世純), 안당(安塘), 정광필(鄭光弼), 조원기(趙元紀), 이목(李穆), 정희량(鄭希良), 이현보(李賢輔), 박상(朴祥), 김안국(金安國), 허굉(許硡),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이정경(李延慶), 한충(韓忠), 시산정 정숙(詩山正 李正叔), 파릉군 경(巴陵君 璥), 소세영(蔡世英), 박광우(朴光佑), 이사균(李思勻), 이언적(李彦迪), 권벌(權橃), 김정국(金正國), 소세양(蘇世讓), 경세인(慶世仁), 이황(李滉), 성수침(成守琛), 서경덕(徐敬德), 백인걸(白仁傑), 이준경(李浚慶), 임권(任權), 정희등(鄭希登), 박소(朴紹), 김인후(金麟厚), 이몽규(李夢奎), 홍언필(洪彦弼), 상진(尙震), 안현(安玹), 성혼(成運), 조식(曺植), 鄭(石+廉), 심연원(沈連源), 심봉원(沈逢源), 민기(閔箕), 이탁(李鐸), 정종영(鄭宗榮), 류희춘(柳希春), 이담(李湛), 정유길(鄭惟吉), 이이(李珥), 이중호(李仲虎), 순천군 관(順天君 琯), 이항(李恒), 기대승(奇大升), 김근공(金謹恭), 김체휘(金繼輝), 박순(朴淳), 홍성민(洪聖民) 등 128명의 인물이다.
- 곤책 - 63명
- 이제신, 윤두수, 윤근수, 류성룡, 조헌, 고경명, 원호, 이정암, 성혼, 정구, 김장생, 이지함, 서기, 민순, 이지남, 김성일, 박동현, 오억령, 송상현, 이항복, 이덕형, 김여물, 박동량, 홍이상, 서성, 절신군 수곤, 김천일, 이순신, 권율, 곽재우, 이호민, 이산보, 이직언, 이귀, 황신, 이정구, 이시발, 장운익, 정화, 류행, 한준겸, 이원익, 나급, 오윤겸, 정충신, 김덕령, 이춘원, 구천군 수(晬), 김권, 이상길, 김응하, 김류, 장만, 이서, 김상용, 심현, 신익성, 정온, 임숙영, 민성휘, 홍명구, 이시직, 윤계
《해동신감》은 《해동명신록》의 서술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체제적인 면에서도 《역대신감》을 따랐다고 하면서도 《역대신감》이 선악에 따라 인물을 구분 서술한 것과 달리 《해동신감》은 선악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악한 이는 아예 수록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부터 주자의 《송명신언행록》에 영향을 받은 일련의 '국조명신언행록'류의 저술들이 편찬되는데, 이들 책들은 대부분 야사류에서 많은 자료를 취합하여 원자료를 수록하여 간략하게 신하의 약력과 그 의리, 충절을 확인하려는 정조의 입장에서는 한 인물의 일생에 대해 일정한 관점에 따라 적을 수 있는 서술체 형식을 지니고 있는 《해동명신록》의 서술 방식이 더 편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4]
《해동명신록》과 비교하여 재수록, 혹은 탈락된 인물들을 보면[5]
- 태종에서 세종, 문종으로 이어지는 왕조 초기에는 훈신들을 다루면서 정도전과 같은 개혁론자들은 수록되지 못하였고,
-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하여 생육신과 사육신을 수록하면서 많은 인원이 기록되었고,
- 연산군에서 명종대까지는 주로 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행적을 적으면서 치세에 비해 많은 인원이 기록되었고(충의의 신하와 심신을 단련한 신하를 적으려는 뜻이 반영되어 있다)
- 선조대는 전후 시기와 비교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인조대는 선현 이외에 일부 병자호란 관련자가 기록되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기록되어 있다.
등의 특징이 있는데, 미수록자들은 재수록자에 비해 반드시 학문이나 행적에 있어서 저명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당파에 따라 특정 당색을 배제한 것도 아니었지만, 계유정난 때에 세조를 도운 신숙주, 한명회, 최항, 윤자운 등이 탈락된 것은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a] 중종이나 명종대의 사화(士禍) 관련자로써 상대적으로 피화(被禍) 즉 사화로 인한 피해를 입은 정도가 덜했던 인물들이 제외되었다.[7]
인물의 행적 가운데 어릴 때부터의 개인적 성장 과정, 단순한 관력과 같은 이력사항, 그리고 개인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인 부분 등은 대부분 생략하고 대신 충성, 도덕, 의리, 효도 등의 측면에서 크게 현창할 만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남기고 있는 점에서, 후대에 본보기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 《해동신감》의 편찬 방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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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문헌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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